콘텐츠바로가기

뉴스인사이드

스타+

누구나 아는 비밀

글자작게 글자크게 인쇄 목록으로

스페인 하라마 계곡과 토레라구나

'누구나 아는 비밀'이라는 말은 '둥근 삼각형'처럼 형용 모순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하지만, 처음엔 비밀이던 것이 시간이 흐른 뒤 누구나 다 알게 됐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렇게 보면 모순이라기보다는 변화를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고, 나아가 '결국 누구나 알게 된다'는 '비밀의 속성'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아쉬가르 파라디 감독의 영화 '누구나 아는 비밀'의 스페인어 원제목과 영어 제목은 'Todos lo saben', 'Everybody Knows'로 '누구나 알고 있다'로 해석되는데, '비밀'이라는 형식과 '누구나 알고 있다'는 내용이 충돌하면서 '비밀'이 멈춰져 있지 않고 변화해가는 양상을 보여주는 한국어 제목이 더 맘에 든다.

이 영화에서 제목에 등장한 그 '비밀'이란 뭘까.

관객은 영화가 시작되기도 전에 먼저 그게 궁금하다.

동생의 결혼식 참석을 위해 아이들과 함께 고향을 찾은 라우라(페넬로페 크루즈 분)는 오랜만에 만난 가족, 마을 사람들과 함께 떠들썩한 파티를 즐긴다.

그런데 파티 도중 딸이 감쪽같이 사라진다.

이어 납치범으로부터 거액의 몸값을 요구하는 협박 메시지가 날아든다.

영화 제목에 나오는 '비밀'과 딸의 납치는 어떤 관련이 있는 걸까.

관객들은 '비밀은 무엇일까'와 '납치범은 누구일까'라는 두 가지 의문을 품고 스토리를 따라가며 추리하게 된다.



영화는 막바지를 향해가며 비밀도 드러나고 납치범도 밝혀지지만, 미스터리의 극적 긴장감을 기대했던 관객들의 기대에 등을 돌리고 장르적 쾌감보다는 과감하게 여운과 메시지를 선택한다.

페이드 아웃 처리된 마지막 씬. 라우라의 딸 납치범이 아주 가까운 누군가임을 눈치챈 라우라의 언니는 라우라 식구가 떠난 직후 남편을 불러 앞에 앉힌 뒤 뭔가를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언니가 남편에게 '비밀'을 이야기하면 그 비밀은 언젠가 '소문'이 된다.

그리고 그 소문은 다시 '누구나 아는 비밀'이 될 것이다.

라우라 딸의 납치를 부른 그 '비밀'을 포함해 세상의 모든 비밀은 이렇게 '누구나 아는 비밀'로 바뀌어간다.



이 영화는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서 40분 거리에 있는 작은 시골 마을 토레라구나(Torrelaguna)에서 찍었다.

마드리드 자치주의 북동쪽에 있는 하라마(Jarama) 계곡의 한가운데 있다.

인구 5천명이 채 안 되는 소도시를 선택한 건 아마도 모든 비밀의 생성과 확산이 오프라인에서도 쉽게 가능한 공간적 유한성을 필요로 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곳을 단지 작은 시골 마을이라고만 생각해선 안 된다.

토레라구나는 15세기 역사적 건축물들이 즐비한 고색창연함과 연중 투명한 햇살 아래 그윽한 포도 향이 공존하는 매력적인 곳이다.

마드리드를 간다면 당일로 다녀올 수 있다.

톨레도, 아랑후에스, 세고비아 등처럼 여행자들로 북적이지도 않는다.



토레라구나는 스페인 가톨릭의 역사적 인물들이 태어난 곳으로도 유명하다.

알칼라 데 에나레스대학과 주변 역사지구를 건립한 시스네로스 추기경, 수호성인인 성 이시드로 라브라도와 그의 아내 성녀 마리아 데 라 카베사 등이 이곳 출신이다.

영화에서 라우라가 고향에 도착해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던 마을 광장, 라우라 여동생의 결혼식이 열린 고딕 양식의 막달레나 성당은 세월의 더께가 묻어나는 마을 역사의 중심이자 랜드마크다.

곳곳에 늘어선 15세기 마을 성벽의 유적, 수도원, 곡물 저장소 등이 이방인의 눈길을 잡아끈다.

토레라구나에서는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지만, 도시는 로마인들이 건설했고 중세 카스티야 왕국의 후안 1세가 1390년 프리타운으로 선언할 때까지 우세다(Uceda) 지역의 일부였다.

지금도 항아리에 담은 스튜 같은 전통 음식을 맛볼 수 있고 6월 초에는 거리가 온통 꽃으로 장식되는 성체축일(Corpus Christi) 축제를 즐길 수 있다.

온화한 날씨와 아름다운 풍광을 가진 산악자전거(MTB) 코스로도 유명하다.



영화 촬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캐리 그랜트, 소피아 로렌, 프랭크 시나트라가 주연한 영화 '자랑과 정열'(1957)에서도 토레라구나의 풍경을 볼 수 있다.

무엇보다 마을이 자리한 하라마 계곡은 스페인 내전 당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전장으로 뛰어든 전 세계 젊은이들이 목숨을 바친 곳이다.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배경이 됐던 하라마 계곡 전투에서 수천 명의 국제여단 소속 청년들이 생을 마쳤다.

전투가 끝난 뒤 국제여단의 정치위원이던 멕데이드는 캐나다 민요 '홍하의 계곡'에 가사를 붙여 그 유명한 노래 '하라마 계곡'을 만들었다.

내전이 끝난 뒤 붙여진 가사에는 '이제는 저 슬픈 계곡과 헤어지지만, 우리는 결코 잊을 수 없네'라는 구절이 있다.



오늘도 인간의 비밀은 소문이 되어 숱한 허공을 맴돈다.

이 하찮고 가볍고 자잘한 인간사도 세월의 무게에 붙잡히면 한 개인이 감당하기엔 너무 힘겹고 비극적인 운명의 사슬이 될 수도 있다.

그 복잡계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시도는 과연 가능한 것일까.

인간은 그 가벼운 입이 아니더라도, 어떤 방식이든 스스로 흔적을 남긴다.

성당의 낡은 종탑 벽에 새겨진 비밀의 글귀처럼…
이렇듯 비밀과 소문은 무성한데, 그 모든 걸 지켜본 푸른 하늘도, 이끼 낀 종탑도, 포도나무도 아무런 말이 없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9년 10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연합뉴스

오늘의 신문 - 2024.03.28(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