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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자의 슬픔 ‘악질경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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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터테인먼트 전문 미디어 텐아시아가 ‘영평(영화평론가협회)이 추천하는 이 작품’이라는 코너를 통해 영화를 소개합니다. 현재 상영 중인 영화나 곧 개봉할 영화를 영화평론가의 날카로운 시선을 담아 선보입니다. [편집자주]
영화 ‘악질경찰’ 포스터. /사진제공=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영화 ‘악질경찰’ 포스터. /사진제공=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부패에 찌든 형사가 한 사람 있다. 그는 범죄를 무마해주는 조건으로 뇌물을 받고 때로는 스스로 범죄자와 짜고 도둑질까지 저지른다. 썩을 대로 썩은 것이다. 그러다가 우연히 거대 조직의 비리에 연계되면서 목숨이 달아날 위기로 내몰렸다가 우여곡절 끝에 조직을 소탕하고 그 우두머리까지 응징한다. 어디선가 익숙한 느낌의 이야기 전개 아닌가. 최근에 만들어지는 범죄영화들의 상투적 구조라서 그런가보다. 여기에 범죄 집단이 거대 재벌이거나 막강한 검찰조직이거나 아예 유명 정치인이라면 긴장감이 더해질 테고 그 수하에 막강한 무술실력을 가진 하수인이 있다면 더욱 재미가 있을 것이다. 비열한 음모와 더불어 화려한 액션까지 즐길 수 있으니 말이다.

이선균이 열연을 한 ‘악질경찰’은 여타 범죄물과 비교할 때 그 구조면에서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범죄에 연계된 또 하나의 상황은 결코 이 영화를 도매금으로 넘길 수 없게 만든다. 이정범 감독은 ‘아저씨’에서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화끈한 액션을 선보였지만 ‘집으로 가는 길’에서는 사회문제를 심각하게 다룬 바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악질경찰’은 두 방향을 동시에 품으려 하는 듯하다. 바로 온 국민의 고통으로 남아있는 ‘세월호’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선보여서이다.

영화 ‘악질경찰’ 스틸. /사진제공=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영화 ‘악질경찰’ 스틸. /사진제공=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비행 소녀 미나(전소니)는 조필호(이선균) 형사와 묘하게 얽히곤 한다. 아파트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치고, 범죄 현장에서 만나고, 급기야 같이 납치되고 만다. 하지만 가장 큰 인연은 조필호가 미나의 초등학교 동창인 지원의 아빠를 구한 데서 비롯한다. 지원은 세월호가 잠길 때 빠져나오지 못했고 말이다. 미나는 지원이 선물한 운동복을 영화 내내 입고 다니며, 세상에 없는 지원에게 어울릴만한 원피스를 사고, 혼자서 지원의 생일 케이크에 불을 붙인다. 지원 아빠는 딸을 추억하려 그 운동복을 꼭 다시 찾기 원하고 말이다. 납치당한 후 궁지에 몰린 미나가 스스로 옥상에서 뛰어내리며 한 말은 “이런 것들도 어른이라고……”였고, 미나와 조필호를 끌고 왔던 태주(박해준)의 한마디는 “쟤, 미친 거 아냐?”였다.

미나가 경험한 어른들의 세계는 비열하기 짝이 없다. 국내 최대 재벌 총수인 정의향(송영창) 회장은 장학금을 수여한다며 학생들 앞에서 일장연설을 하지만 뒤로는 온갖 비리와 불법을 저지르며 아방궁의 쾌락에 빠져든다. 그의 하수인 태주는 회장이 하라는 일은 무엇이든 가리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남 검사(박병은)는 앞뒤가 확연하게 다른 인간이다. 불법 낙태를 시켜주는 돌팔이 의사는 수시로 미나에게 수작을 건다. 조필호는 갖은 욕을 하면서 미나를 끌고 다닌다. 두 사람 사이의 대화를 보면 상대에 대한 존중이라고는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 어른이 청소년과 그런 식의 대화를 나눌 수 있을지 의심이 들 정도다.

영화 ‘악질경찰’ 스틸. /사진제공=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영화 ‘악질경찰’ 스틸. /사진제공=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세월호 사건이 터졌을 때 어른들은 사태를 무마하기 위해 사실을 왜곡했고 온갖 정치적 술수를 사용했으며 나라의 안정을 위한다며 오히려 세월호 유족들을 사찰했다. 그런가 하면 한 쪽에서는 ‘그깟 교통사고에 11억 원이나 보상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반문도 들려왔다. 꼭 험한 욕설을 내뱉어야만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게 아니다. ‘악질경찰’에 나오는 어른들에서 세월호 희생을 유린한 어른들의 모습을 찾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악질경찰과 부패검사와 양심불량의 퇴폐재벌과 그의 하수인들, “이런 것들도 어른이라고……”

지원은 아마 배가 가라앉을 때 자신이 죽게 되리라는 생각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아무도 구하러 오지 않았고 배가 점점 기울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떤 친구들은 배 밖으로 기를 쓰며 나가는데 지원은 미처 용기가 안 생겨 그렇게 못했다. 이리저리 시간이 흐르자 아주 작은 희망마저 사라져갔다. ‘내가 이렇게 죽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터다. 그 때 옆에 있던 친구가 핸드폰을 꺼내들더니 문자를 날리는 것을 보았다. 누구에게 어떤 문자를 날리는지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지원도 핸드폰을 꺼내들고 미친 듯이 문자판에 글을 찍었다. 물에 젖어 눈이 안 보일 때까지, 바다물이 폐에 가득 차 숨이 넘어갈 때까지, 손톱이 빠져 달아날 때까지. “엄마, 아빠 사랑해요.”

우리가 듣지 못했던 그 말을 미나는 분명히 들었다. 그래서 죽은 지원의 옷을 입었고 케이크에 불을 붙여주었으며 결국 미나 역시 죽음을 선택하고 말았다. ‘악질경찰’이 며칠 동안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이유다.

박태식(영화평론가)

오늘의 신문 - 2024.05.04(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