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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이 죽었다!’, 권력을 둘러싼 진창과 난장의 블랙코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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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터테인먼트 전문 미디어 텐아시아가 ‘영평(영화평론가협회)이 추천하는 이 작품’이라는 코너를 통해 영화를 소개합니다. 현재 상영 중인 영화나 곧 개봉할 영화를 영화평론가의 날카로운 시선을 담아 선보입니다. [편집자주]
영화 ‘스탈린이 죽었다!’ 포스터. /사진제공=M&M 인터내셔널

영화 ‘스탈린이 죽었다!’ 포스터. /사진제공=M&M 인터내셔널

독재자가 죽었다. 무소불위의 권력도 죽음을 막을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범접 불가능했던 권력은 자기 목을 조르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저질렀던 타인에 대한 추방은 자신의 몰락으로 종결됐다. 영화 ‘스탈린이 죽었다!’는 그러한 아이러니의 순간을 날카롭게 포착한다. 등장인물들의 관계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급격한 전환을 이루고, 그들의 운명은 희극과 비극의 경계를 넘나든다.

“노동자 한 명이 5분 일찍 공장에 도착했다. 그는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었다. 다른 노동자가 5분 늦게 도착했다. 그는 사회주의 건설 의무에 나태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세 번째 노동자는 제시간에 도착했다. 그는 반 소비에트 선동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는 스위스에서 만든 시계를 차고 있었다.”(Bruce Adams, Tiny Revolutions in Russia: Twentieth-century Soviet and Russian History in Anecdotes, New York: Routledge, 2005, *88)

위에 인용한 스탈린 시대의 정치 유머는 서사 무대 속 암울한 시대상을 엿보게 한다. 완전한 사회를 꿈꾸던 소비에트연방은 모순을 은폐하기 위해 ‘인민의 적’을 기계적으로 재생산하고, 이를 바탕으로 스탈린은 절대 권력을 휘둘렀다. 고발을 위한 고발이 시스템화된 사회에서 타인과의 관계는 황폐해졌다. 어제의 동료는 내일의 적이 되며, 생존을 위해선 누명을 쓴 가족에게도 등을 돌려야만 했다. 시트콤 ‘VEEP’ 시리즈를 통해 블랙코미디에 대한 남다른 감각을 보여준 이아누치 감독은 그러한 시대의 부조리를 냉소적인 시선으로 재현한다.

영화 ‘스탈린이 죽었다!’ 스틸. /사진제공=M&M 인터내셔널

영화 ‘스탈린이 죽었다!’ 스틸. /사진제공=M&M 인터내셔널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라고 했던가. ‘스탈린이 죽었다!’에서 웃음은 폭압적인 시대를 감내하는 인간의 극심한 긴장과 무시무시한 공포를 역설적으로 전시하는 데서 발생한다. 이를테면 세계제일의 강대국을 노리는 소련에 독재자를 구할 능력 있는 의사가 없다. 그들은 이미 스탈린의 명령에 의해 처형 당했거나 수용소에 감금된 뒤이기 때문이다. 처벌의 이유는 더 기가 막힌다. 단지 그들이 독을 제조할 수 있는 약학 지식을 지녔기 때문이다. 쓰러진 스탈린을 치료하기 위해 ‘동원’되는 건 뭔가 모자라 보이는 의사들이다. 물론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은 영화적 과장에서 비롯한다. 하지만 일부 사건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기도 한다. 예컨대 경비원들이 두려움으로 스탈린의 방에 들어가지 못한 일과 독살을 염려해 의사를 제때 부르지 못했다는 일화가 그렇다. 사실 중요한 것은 사건의 역사적 진위가 아니다. 영화는 재치 있는 상상력을 더해 전일적인 권력이 야기하는 부조리한 상황에 접근하며 권력의 민낯을 드러낸다.

흥미로운 부분은 공산당 중앙위원회와 소련 인민들이 스탈린을 대하는 태도이다. 스탈린의 언행은 공동체의 완벽한 규범으로 기능한다. 마음속 깊이 그러한 논리에 승복하든 아니든 말이다. ‘스탈린이 죽었다!’에서 웃음과 비애는 그 기괴한 불일치에서 발생한다. 총살을 당하기 직전 사형수들은 위대한 독재자의 이름을 외친다. “스탈린 만세!” 또한 인민은 독재자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행진하다가 살해당하기도 한다. 이처럼 사회주의 사회에서 독재자의 죽음을 둘러싼 피지배 계급의 반응은 기이하기 짝이 없다.

영화 ‘스탈린이 죽었다!’ 스틸. /사진제공=M&M 인터내셔널

영화 ‘스탈린이 죽었다!’ 스틸. /사진제공=M&M 인터내셔널

영화 속 소련 사회가 전달하는 기이함은 한국인에게 더욱 의미심장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한 낯선 감각을 이해하는 데 역사학자 쉴라 피츠팩트릭의 견해는 유의미한 성찰을 준다. 스탈린이 주창한 ‘설득과 강제’의 도식은 당대 소련의 정치·사회적 실천 강령을 축약한다. 이 논리는 스탈린의 독재를 합리화하기 위해 폭압적으로 행사됐다. 그런데 ‘설득과 강제’의 도식은 결과론적으로 볼 때 단순한 흑백논리로서 설명되지 않는다. 막강한 권위의 배면에는 독재체제를 통해 이룬 소련의 ‘위대한 전환’에 대한 역사적 감격과 자부심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 양면성은 영화 속 인민의 집단의식을 이끄는 거대한 구심력이다. 이에 대한 이해 없이는 영화에서 재구되는 소련 사회의 낯선 감각을 따라가기 힘들다.

영화는 스탈린의 죽음 이후 헤게모니를 쟁취하려는 권력자들의 진흙탕 싸움을 다룬다. 이들은 서로에게 배신을 거듭한다. 여기서 나타나는 인물의 입체적인 일면과 처절한 몰락은 기묘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이 싸움은 혼란한 시대에서 살아남으려는 발버둥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명심할 것은 권력자들의 이기심과 진흙탕 싸움이 야기한 사회적 파급력이다. 이들은 타인의 생명을 도박 밑천처럼 이용한다.

‘스탈린이 죽었다!’는 순수한 블랙코미디 장르 영화로서도 상당한 수작이다. 특히 복잡한 국제관계와 특수한 사회·역사적 상황에 놓인 한국인에게 여러 모로 생각할 거리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조한기(영화평론가)

오늘의 신문 - 2024.05.02(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