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많은 사람이 기다려온 공연이었다. 언제나 가장 넘기 힘든 것은 사람들의 ‘기대’다. 로열콘세르트헤바우오케스트라(RCO), 피아니스트 키릴 게르스타인, 그리고 지휘자 클라우스 메켈레. 이 세 이름은 이미 엄청난 연주가 나올 것이라는 하나의 약속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들은 여전히 서로를 알아가고 음악적인 실험을 계속하고 있었다. 진짜 예술은 그 ‘완벽하지 않음’ 속에서 자라난다. 좋은 예술은 정답이 아니라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지난 5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로열콘세르트헤바우오케스트라의 내한공연에서 메켈레와 오케스트라가 함께 음악을 만들고, 함께 성장해가는 이야기를 실시간으로 지켜봤다.
첫 곡은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이었다. 지휘자나 오케스트라 입장에서 투어 첫날의 첫 공연은 언제나 부담이 크다. 낯선 환경, 시차, 그리고 완전히 다른 무대의 음향에 적응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1악장에서는 그런 긴장감이 그대로 묻어났다. 현악기 안에서 타이밍이 미세하게 엇갈렸고, 파트 간의 호흡도 완전하지 않았다. 협연자와 오케스트라 사이에도 약간의 거리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메켈레는 그 모든 불안정함을 시시각각 들으면서 침착하게 조율했다. 그는 박자를 맞추기보다 에너지의 방향을 한쪽으로 정렬시키며, 점차 소리를 하나로 모았다. 게르스타인은 브람스의 견고한 구조 안에서 유연하게 연주했다. 풍부한 표현력과 변화무쌍한 템포 조절은 그가 단순한 테크니션이 아니라 이야기를 들려주는 서사적 피아니스트임을 보여줬다.
2악장부터는 오케스트라와 피아노의 결이 서서히 섞여 들어갔다. 여유 있고 느린 2악장의 템포 속에서 피아노 소리가 쉴 새 없이 안으로 노래하고 있었다. 3악장에서는 리듬과 함께 즉흥성이 살아났고, 오케스트라의 묵직하면서도 따뜻한 사운드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메켈레와 게르스타인이 만들어낸 리듬의 유연함은 놀라웠다. 비로소 긴밀한 대화들이 적극적으로 이뤄졌다. 메켈레의 지휘는 RCO의 목관과 현악 사이를 오가면서 새로운 에너지들을 만들어냈다. 미로와 같은 작품 속에서 결국에는 나가는 길을 찾아냈다. 앙코르로 들려준 슈만의 ‘꽃의 노래(Blumenstück)’는 내면의 감정을 조심스레 눌러 담은 연주였다. 정서적으로 브람스 협주곡의 2악장과 맞닿아 있었다. 단순한 음형(音形) 속에서 눈치채기 힘든 변화들을 쉬지 않고 만들어낸 게르스타인의 연주는 확실히 브람스와 슈만의 내면을 동시에 닮아 있었다.

2부는 버르토크의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Concerto for Orchestra)’이었다. 버르토크는 이 작품을 1945년 초연한 후 1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절망 속에서 삶을 바라본 그의 ‘유언’과도 같은 곡이다. RCO의 현악은 공간을 가득 채우면서도 모서리가 매끄럽게 다듬어져 있었고, 목관은 다채로운 색채로 그 위를 수놓았다. 금관은 동굴 속 한 줄기 빛처럼 신비로운 울림을 냈다. 메켈레는 전반적으로 차갑고 분명하게 컨트롤하면서도, 악장마다 ‘한 끗’을 놓치지 않는 해석을 보여줬다.
1악장의 도입부는 둥글고 따뜻한 음색 위로 날이 선 긴장감을 만들어냈다. 2악장은 초반부터 바순의 활약이 두드러졌고, 목관군 전체가 살아 있는 듯했다. 3악장 ‘엘레지아’에서는 첼로의 도입이 스산한 분위기를 내고, 악기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엘레지아만큼은 훨씬 더 모두가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신비로움을 기대했기에 조금은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4악장이 가장 좋았다. 수많은 변박과 홀수 박자 속에서도 메켈레는 버르토크의 내면을 섬세하게 꺼내 보였다. 까치발로 느린 춤을 추는 소녀의 이미지가 떠오르기도 했다. 그 한가운데에서 터진 ‘레닌그라드’ 패러디는 강렬했다. 다만 가장 돋보여야 할 1바이올린의 존재감은 다소 아쉬웠다. 5악장의 푸가에서는 역시나 RCO다운 연주를 유감없이 뽐냈다. RCO의 금관이 보여준 집중력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과장되지 않은 힘, 그러나 완벽히 통제된 빛이 오케스트라 전체를 비췄다. 그 모든 것은 버르토크 음악의 생명력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메켈레는 곡의 끝까지 감정을 토해내지 않았다. 마지막 음까지 통제된 열정으로 밀어붙이며, 이 음악이 가진 근원적인 힘을 끝내 관객에게 남겼다. 앙코르는 선곡이 재미있었다. 헝가리의 국민 작곡가 버르토크의 작품이 끝나자마자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헝가리 만세(Éljen a Magyar!)’가 이어졌다.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가 단숨에 밝아졌고, 메켈레의 재치와 여유가 무대를 마무리했다.
이날 연주에서 단원들의 표정이 많은 것을 말해줬다. 그들은 음악을 제대로 즐기고 있었다. 메켈레의 가장 큰 힘은 바로 그 즐거움에서 나온다.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낼 수 있는 에너지가 무대를 채웠고, 그 자신도 누구보다 행복해 보였다. 커튼콜 당시 지휘자에게 온전히 보낸 단원들의 박수가 그들의 마음이다. 메켈레는 확실히 연주자들을 재밌게 만든다. 음악성과 스타성을 동시에 갖춘 지휘자는 정말 드물다. 그는 이제 로열콘세르트헤바우오케스트라의 미래다. 위대한 오케스트라를 더 위대하게 만드는 일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는다. 지휘자의 전성기가 대개 70대 전후라는 점을 생각하면, 앞으로 40년 이상 우리는 이 젊은 지휘자의 성장을 함께 지켜보게 될 것이다. 메켈레 스스로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여정은 길다는 것. 그리고 음악에 대한 사랑과 헌신만이 오케스트라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을.
안일구 음악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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