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빨래가 바람에~ 제 몸을 맡기는 것처럼~ 인생도 바람에~ 맡기는 거야."
'서울살이 몇핸가요?'라고 물으며 모든 상경러들의 지친 마음을 어루만졌던 뮤지컬 '빨래'가 20주년을 맞았다.
상경한 청년들의 일상과 꿈·관계 속 애환을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낸 이 작품은 '위로와 성장의 씨앗'으로 많은 이들의 청춘을 함께해 왔다. 슬픔도 억울함도 같이 녹여서 빨자고 말하는 대표 넘버는 힘들고 지치는 순간마다 꺼내어 부르는 상징적인 청춘 찬가로 관객들의 삶을 지탱해 왔다.
'빨래'의 음악은 부담 없이 귀에 들어오는 친근한 멜로디와 섬세하게 구현된 감정선으로 작품의 큰 축을 담당한다. 최근 서울 종로구 동숭동 모처에서 만난 민찬홍 작곡가는 "20주년이라는 긴 시간을 쌓아온 게 실감 나지 않는다. 감사한 일이다. 열심히 작업하고, 작품을 이어 나가다 보니 이런 날이 오는구나 싶어 감동적이다. 함께했던 분들한테 감사한 마음이 크다. 특히 관객분들"이라며 미소 지었다.

'빨래'는 2003년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재학 중이던 민 작곡가와 추민주 연출, 서나영 배우 등이 의기투합한 졸업 공연으로 출발해 2005년 국립극장 별오름극장 무대에 오르며 정식 공연으로 발전했다.
민 작곡가는 "'빨래'로 뮤지컬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감사한 작품이었고, 시간이 흐르면서는 인생을 배운 작품이 됐다. 작곡가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방향을 알려준 작품이다. 이 작품 안에서 이루어진 모든 일들이 처음 겪는 것이었다. 배우들을 만나고, 라이브 연주를 하고, 사랑을 받는 모든 게 처음이었다. 서툴러서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를 때도 있었지만, 덕분에 호기롭게 부딪혀보고 좌충우돌해볼 수 있었다. 나를 성장시켜주고 배우게 해준 작품"이라고 털어놨다.
'빨래'에 참여했던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묻자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점이 와닿았다"고 답했다. 민 작곡가는 "당시는 창작 뮤지컬이 많지 않았던 시절이다. 주로 라이선스 작품으로 이루어진 시절이었고, 특히 일상적이고 소시민적인 소재로 뮤지컬을 쓰는 게 흔치 않았기에 신선하게 다가왔다. 내가 잘 아는 서민들의 이야기였다"고 밝혔다.
'서울살이 몇 핸가요', '비 오는 날이면', '한 걸음 두 걸음', '참 예뻐요', '슬플 땐 빨래를 해' 등 '빨래'의 넘버는 때로는 흥겹게, 때로는 서정적으로 매 순간 관객들의 마음을 건드렸다. 지난 20년간 '빨래'는 관객들이 좋아하는 순수성을 살리면서도, 더 완성도 있는 극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겪었다.
7개의 넘버로 구성됐던 졸업 공연 형식의 1, 2차 시즌을 지난 뒤 3차 때 넘버가 16개로 늘어났고, 1·2막으로 나뉜 2시간 반 정도 길이로 짜이는 등 변화를 겪었다. 민 작곡가는 "그때 음악이 크게 한 번 완성됐다. 조금 더 큰 밴드 편성으로 연주할 수 있게끔 대중적이면서도 다이내믹하게 16개 넘버의 전체 편곡을 다시 했다"고 말했다.

한 차례 더 변화가 온 시점은 2009년 5차 때였다. 임창정, 홍광호, 곽선영, 이정은 등 배우들이 출연하는 가운데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막이 오른 때였다. 민 작곡가는 "그때 '안녕', '한 걸음 두 걸음' 2곡을 더 추가했다. '주인공의 솔로 넘버가 없지 않나' 하는 갈증을 풀어내기 위해서였다. 주인공의 드라마를 더 드러내면서 지금 형태의 18곡으로 완벽하게 완성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여건상 표현하지 못했던 것들을 들려드리는 데 주력했다. 연주적인 퀄리티도 높이고 싶었고, 기본적으로 밴드 사운드이지만 클래식한 감성을 넣으려 했다. 스트링 연주가 특징이고, 빠른 곡에선 브라스 연주가 있다. 정서적인 부분은 하모니카, 멜로디언 등 따뜻한 음색을 내주는 휘슬이나 멀티 악기들을 최대한 많이 넣었다"고 부연했다.
그러면서 "화려함을 추구한 게 아니다. 전보다 업그레이드하면서도 정서적인 부분은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따뜻한 색깔이 유지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특히 5차 공연을 포함한 초반 시즌이 더욱 기억에 남는 건 소극장임에도 라이브 연주를 선보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MR로 공연할 때도 민 작곡가는 일부 악기라도, 일정 기간이라도 최대한 라이브의 맛을 관객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그리고 20주년을 맞은 올해 드디어 '빨래'의 넘버들을 생생한 라이브로 들려줄 기회가 생겼다. 20주년 콘서트를 통해서다.
민 작곡가는 "모든 악기가 다 라이브로 했던 건 5차가 마지막이다. 정말 오랜만에 전체 라이브로 연주하는 넘버를 들을 수 있다"면서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했다. 대부분의 곡을 콘서트에 걸맞게 편곡했다. 새로운 아이디어와 시도를 곁들여서 많이 새로울 거다. 일부는 관객분들이 사랑해줬던 그대로의 음악을 들을 수 있고, 일부는 감동이 한층 더 한 새로운 편곡"이라고 귀띔했다.
구성은 기타, 베이스, 드럼, 피아노, 키보드, 바이올린 1·2, 비올라, 첼로까지 9인조로 편성됐다. 민 작곡가가 직접 피아노 연주에 나서는 것도 관람 포인트다.



화제를 모은 건 콘서트 참여진들이다. 이정은, 이규형, 정문성, 박지연, 리베란테 김지훈 등 그간 '빨래'를 거쳐 간 출연진들이 힘을 싣는다.
민 작곡가와 제작사 씨에이치수박의 최세연 대표가 1년간 백방으로 뛴 결과다. 영화 '기생충'·'옥자'·'도둑들'·'애마' 등의 의상감독으로 활약한 바 있는 최 대표는 민 작곡가, 추 연출과 함께 '빨래' 졸업 공연에서 호흡했던 이른바 '0차 공연'의 멤버이기도 하다. 현재 씨에이치수박을 이끌며 '빨래'의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장본인이다.
민 작곡가는 "컴퍼니와 연초부터 기획을 시작해 구성, 음악 편곡 등을 1년 내내 준비했다"며 "'빨래'는 배우의 힘이 크지 않나. 음악에 배우의 목소리를 많이 써서 표현해 보고 싶었다. 3회차에 걸쳐서 30명 정도 게스트가 나온다"고 밝혔다. 이전에 없던 합창까지 추가되면서 배우들은 한 달가량 맹연습 중이라고 했다.
배우들의 일정을 확인하고 소통하는 과정에서 민 작곡가는 감사함과 뿌듯함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바쁜 와중에 다들 참여 의사를 밝혀줬다. 이들과 한 자리에서 20주년을 기념한다는 게 뭉클했다. 무대에 서진 못하지만 객석에서 응원하겠다는 분들도 많았다. 축제의 장이 될 것 같다"며 웃었다.

망설임 없이 "참여하겠다"고 말할 정도로 배우들 역시 유독 애정을 드러내는 작품이 바로 '빨래'다. 대표적인 사례가 홍광호다. 한국 배우 최초로 영국 웨스트엔드 무대에 서는 등 승승장구했던 홍광호는 2016년 한국으로 돌아와 7년 만에 '빨래' 재출연을 결정해 화제가 됐다. 대극장 무대에 주로 서던 그의 파격적인 행보에 티켓이 동나는 등 당시 파급력이 상당했다.
민 작곡가는 "인생의 경험이 녹아들수록 성숙하게 보이는 캐릭터들이라 배우가 컴백하는 경우가 많다. 홍광호 배우는 타지 생활을 하고 와서 '솔롱고의 마음을 너무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이번 콘서트 연습 과정에서는 "박지연 배우가 '빨래'를 부르면서 눈물을 글썽이더라. 그 모습에 나도 연주를 멈췄다"고 했다.
이어 "배우들이 커튼콜에서 관객들의 눈빛을 보면서 치유되는 느낌이라고 한다. 그래서 '빨래' 무대를 잊지 못하는 것 같다. 자연스럽게 역할을 소화하면서 1000회를 넘긴 분도 있고, 다른 배역으로 여러 차례 무대에 서는 분들도 있다"고 덧붙였다.
'대학로에 가면 늘 빨래가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빨래'는 20년간 흔들림 없이 한국 창작 뮤지컬로써 유의미한 역할을 해왔다. 작품을 거쳐 간 배우만 200여명을 훌쩍 넘긴다. 함께 호흡하고 감정을 나눈 관객들은 130만명이다. 신진 배우 발굴의 산실이자, 공감과 유대감을 주는 한국형 오리지널 IP로 대학로를 지켜왔다. 무려 오픈런 형식이었다.
민 작곡가는 "당연히 자부심이 있다. 20년 전에는 배울 데가 없었다. 재미는 있었지만 하나하나 다 부딪혀야 했다. 성공한 창작 뮤지컬 사례가 많지 않은 가운데 한땀 한땀 써 내려가는 과정에서 서로 끈끈해질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 "예전에는 브로드웨이, 웨스트엔드의 역사 깊은 공연들이 부러웠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 우리 작품도 그에 다가갈 수 있겠더라. 한국에는 '빨래'가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다만 "자부심에서 그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대학로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기억해주시는 게 감사하다. 그 모습을 더 좋게 지켜나가고 발전해 나가야 한다"고 채찍질했다. "130만 관객들에게 어떠한 감동과 힘을 줬다는 거지 않나. 창작자로서 이보다 행복한 삶이 어디 있겠나 싶다. 그러나 절대 나 혼자 한 건 아니다. 모든 건 관객으로 완성된다"라고도 했다.

민 작곡가 개인으로도 쉬지 않고 달려 나갈 예정이다. '랭보', '렛미플라이'가 브로드웨이 쇼케이스를 앞두고 있고, 신작 뮤지컬 개발도 계속하고 있다.
"이제는 더 새로운 형태로 많은 사람과 소통하는 걸 목표로 하고 있어요. K-뮤지컬이 대세를 향해 달려가고 있잖아요. 아직 조심스럽지만 제 작품으로 조금씩 아시아, 영미권 등 더 많은 관객과 소통의 범위를 넓혀가는 게 꿈입니다."
'뮤지컬 빨래 20주년 콘서트'는 오는 8, 9일 서울 송파구 방이동 우리금융아트홀에서 3회에 걸쳐 진행된다. 뮤지컬 '빨래'는 종로구 동숭동 NOL유니플렉스에서 31번째 시즌이 공연 중이다. 졸업 공연의 멤버이자 극 중 여자 주인공 서나영 역의 시초인 서나영 배우가 주인할매 역으로 함께하며 의미를 더하고 있다.
K컬처의 화려함 뒤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땀방울이 있습니다. 작은 글씨로 알알이 박힌 크레딧 속 이름들.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스포트라이트 밖의 이야기들. '크레딧&'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을 하는 크레딧 너머의 세상을 연결(&)해 봅니다.
김수영 한경닷컴 기자 swimming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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