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바로가기

뉴스인사이드

'기안84' 마라톤 도전에도 포착…"러닝 하면서 봉사" 입소문 [이혜인의 피트니스 리포트]

글자작게 글자크게 인쇄 목록으로

시각장애 '러닝 붐' 확산
장애-비장애 경계 허문 마라톤
함께 달리는 즐거움, 가이드러너로 확산


도심을 가로지르는 마라톤 대회, 수천 명의 발걸음 사이로 50cm 남짓한 끈으로 연결된 두 사람이 눈에 들어온다. 한쪽은 시각장애 러너, 다른 한쪽은 가이드러너다. 두 사람은 함께 웃음과 긴장 속에서 보폭을 맞추며 나아간다. 이들이 달리기는 서로에게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순간이자, 함께 달리는 기쁨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러닝이 기록 경쟁을 넘어 서로의 빛을 나누는 운동이 되는 곳. 그곳이 바로 이들이 만들어가는 마라톤이다.
○장애-非장애 경계 없는 마라톤

국내 유일 시각장애인 마라톤 동호회인 한국시각장애인마라톤회(VMK)를 운영하는 이민규 씨는 올해로 달리기 인생 10년 차를 맞았다. 시각장애를 얻은 뒤 2007년부터 투척 선수로 활약했지만, 지인의 권유로 시작한 달리기가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마라톤을 접하면서 투척을 자연스럽게 내려놨어요. 그만큼 달리기에 빠져들었죠.”

그가 달리기에 진심으로 매료된 건 한 대회에서였다. 당시 에스오일이 주최한 ‘감동의 마라톤’ 프로그램에 선정돼 그리스 아테네에서 열린 마라톤 대회에 참가했다. 이민규 씨는 “응원 소리와 함성에 둘러싸여 달리는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라며 “그 순간 처음으로 ‘같이 운동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구나’ 느꼈다”고 회상했다. 그는 여전히 웅성거리는 소리가 즐겁고, 대회 전 앰프 소리가 울릴 때면 심장이 뛴다.

시각장애인이 접하는 운동은 제한적이다. 시각장애 체육인을 위해 고안된 팀 스포츠인 골볼이나 쇼다운이 대표적이지만, 비장애인에게는 다소 생소하고 함께 참여하기도 쉽지 않다. 간혹 비장애인이 눈을 가리고 참여하기도 하지만 현실적으로 드물다. 참가 인원도 적어 대회 특유의 열기나 현장감을 느끼기 어렵다는 설명이다. 이민규 씨는 “마라톤은 무엇보다 시각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같은 코스, 같은 조건에서 뛸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이라고 말했다.

한국시각장애인마라톤회는 2000년에 설립됐다. 창립 멤버들은 제1회 한·일 친선 시각장애인 단축마라톤대회에 참가해 양국 간 기량 차이를 직접 확인한 뒤, 한국에서도 시각장애인 마라톤 모임이 필요하다고 뜻을 모아 조직을 결성했다. 지금은 매주 1회 남산에서 시각장애인 러너와 가이드러너가 함께하는 훈련과 대회를 진행한다. 전국 각지에서 회원들이 모이는 오랜 전통을 지닌 러닝 커뮤니티로 자리 잡았다.

실력자들도 많다. 과거에는 풀코스 ‘서브3(3시간 미만)’ 기록을 달성한 회원도 있었다. 현재 등록된 회원 중에서는 남성이 풀코스 3시간 9분대, 10㎞ 39분대, 여성이 풀코스 3시간 37분대, 10㎞ 46분대로 가장 빠른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올해는 이 기록이 한층 단축될 것으로 기대된다. 최근 러닝 열풍이 시각장애인 러너들 사이에서도 확산하면서 매주 새로운 초보 러너들도 꾸준히 모여들고 있다.
○함께 달리는 즐거움도
운영진인 비장애인 박태호 씨는 6년 전 달리기를 시작하면서 가이드러너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현재 한국시각장애인마라톤회에서 가이드러너 매칭을 담당하고 있는 그는 “가이드러너는 매칭된 시각장애인 러너보다 조금 더 빠르게 뛸 수 있어야 하지만, 시각장애인 러너들의 실력이 다양하기 때문에 다양한 수준의 비장애인 러너들이 참여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기록이 특별히 빠르지 않아도 괜찮다. 마라톤 초반의 병목 구간을 피하는 요령을 알고, 화장실 위치나 대회 운영 동선에 익숙한 러너라면 충분히 좋은 가이드가 될 수 있다”라고 덧붙였다.

최근 들어 가이드러너에 관심을 갖는 비장애인 러너들이 크게 늘고 있다. 특히 예능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에서 기안84가 마라톤에 도전하는 장면 중, 한국시각장애인마라톤회 회원이 가이드러너와 함께 달리는 모습이 방송되면서 이를 계기로 가이드러너라는 존재를 처음 알게 된 사람들도 많았다. 좋은 경험이 입소문을 타면서 지인의 추천으로 참여하는 이들도 꾸준히 늘고 있다.

'함께하는 가치'를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다. 박태호 씨는 “최근 훈련에는 매주 10명 이상이 처음 참여하고 있다”며 “좋아하는 운동인 러닝을 하면서 동시에 봉사의 보람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을 가장 큰 매력으로 꼽는 분들이 많다”고 말했다.

시각장애 러너 증가, 가이드러닝 문화 확산으로 관련 대회도 증가세다. 지난 9월에는 서울시각장애인스포츠연맹과 서울특별시장애인체육회가 공동 주최한 ‘제11회 시각장애인과 함께하는 어울림 마라톤대회’가 열렸고, 4월에는 키움증권이 주최한 장애인 통합 마라톤 대회 ‘2025 키움런’이 개최됐다.

일반 마라톤 대회에서도 시각장애인 러너와 가이드러너를 위한 배려가 확대되고 있다. 이들을 위한 배번을 지원하고, 안전을 위해 병목 현상을 피할 수 있도록 초반 출발 그룹에 배치하는 식이다. 오늘(2일) 열리는 JTBC 마라톤에서도 주최 측 역시 시각장애인 러너와 가이드러너가 원활히 달릴 수 있도록 A그룹에 배정했다.

○"함께 달릴 무대 더 늘어야"
일본의 경우 지역별 러닝 네트워크가 촘촘히 형성돼 있어 시각장애인들이 보다 쉽게 훈련 기회를 접할 수 있다. 반면 국내는 전국을 통틀어 서울 남산 한 곳에서만 정기적인 훈련이 열린다. 한 번에 80~100명이 모이다 보니, 수도권 외곽이나 지방에서 오는 사람들은 새벽 일찍 출발해야 한다. 그나마 제주도에도 소규모 모임이 있지만, 접근성 면에서는 여전히 한계가 있다.

일반 마라톤 클럽에 가입하려고 해도 쉽지 않다. 비장애인 러너 대부분이 가이드 러닝에 대한 교육을 접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대회 현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변수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영상이나 이론이 아닌 실제 경험을 통한 교육이 필요하지만 이런 시스템이 아직 보편화되지 못했다.

국제적으로는 훨씬 체계적인 지원이 이뤄지고 있다. 미국 뉴욕에 본사를 둔 비영리단체 ‘아킬레스 인터내셔널’은 1983년 장애인이 주류 육상 경기에 참여할 수 있도록 장려하기 위해 딕 트라움에 의해 설립됐다. 지금은 전 세계 모든 수준의 장애인을 위한 국제 조직으로 성장했다. 현재 미국 내 40개 지부를 포함해 몽골, 러시아, 남아프리카, 베트남, 일본 등 6개 대륙 110개 이상의 지부로 확장됐다. 회원 가입은 무료이며, 지역별로 정기 훈련과 대회 참가 지원이 이뤄진다. 시각장애, 뇌졸중, 뇌성마비, 하반신 마비, 절단, 자폐증 등 모든 형태의 장애를 가진 이들이 참여할 수 있다.

“결국 중요한 건 기록이 아니라 행복이에요.” 이민규 회장은 시각장애인들이 마음껏 즐길 수 있는 행사와 환경이 국내에도 더 많아지길 바란다. “의무감으로 달리면 오래가지 못해요. 즐겁게 달릴 때 비로소 다른 사람에게도 ‘함께 하자’고 말할 수 있죠.” 그의 말처럼 달리기의 본질은 경쟁이 아닌 동행에 있다. 누군가는 시야를 나누고, 누군가는 발걸음을 맞춘다. 달리기가 기록을 위한 스포츠를 넘어 서로를 잇는 언어가 된다면, 그날이야말로 ‘함께 달리는 문화’가 일상이 되는 순간일 것이다.

이혜인 기자 hey@hankyung.com

오늘의 신문 - 2025.11.08(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