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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세 요절한 천재의 마지막 소원…'한 번쯤 본 그림' 비밀은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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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해링(Keith Haring)
빛나는 아기, 짖는 개 그림
세상의 모습을 바꾸다


길거리에서 마주친 사람이 입은 티셔츠에서든, 무심코 지나친 카페 벽면에서든, 아마도 한 번쯤은 이 그림들을 만난 적이 있을 겁니다. 굵은 선으로 단순하게 그려진 춤추는 사람들, 짖는 개, 빛을 뿜어내는 아기. 이 유쾌하고 발랄한 그림들은 오늘날 전 세계 어디서나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들의 저작권 수익이 아이들을 위한 복지와 에이즈(AIDS·후천성면역결핍증) 예방·치료에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이 그림들을 그린 화가의 이름은 키스 해링(1958~1990). 그는 글자를 몰라도, 문화적 배경이 달라도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자신만의 양식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해냈습니다. 그의 그림 속 인물들은 끊임없이 춤추고, 뛰고, 에너지를 발산합니다. 이 강력한 에너지는 보는 사람에게 직관적으로 전달되며 활력을 줍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일상에서도 흔히 그 이미지를 볼 수 있다는 건, 해링의 작품이 그만큼 매력적이라는 증거입니다.

키스 해링은 하지만 32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고 맙니다. 그리고 그 직전, 자신의 모든 것을 세상에 남기기로 결심했습니다. 재단을 설립해 관련 수익으로 어려운 이들의 삶을 후원하도록 한 것이었지요. 불꽃같이 살다 간 천재, 키스 해링은 왜 이런 그림들을 그렸을까요. 그리고 이 그림들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요. 영원한 젊은 거장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나만의 선을 찾아
키스 해링의 고향은 끝없는 옥수수밭이 펼쳐진 펜실베이니아의 작은 농장 마을이었습니다. 호기심 많은 소년에게 이곳은 너무 답답한 장소였습니다. 그의 유일한 탈출구는 만화 그리기가 취미였던 아버지를 따라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어린 해링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른 걸 따라 하지 말고 너만의 선을 그어보렴.” 이 말은 그의 삶을 이끄는 길잡이가 되었습니다.

선생님과 친구들이 기억하는 해링은 늘 낙서를 하고 있는 아이였습니다. 해링의 낙서는 늘 작은 도형에서 시작했습니다. 도형에서 시작한 선은 다른 도형으로 이어지고, 선은 끝없이 흐르며 공간을 채우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해링은 생각했습니다. ‘그림을 그리면서 살고 싶다.’ 1978년, 스무살이 되던 해 그는 뉴욕 시각예술학교(SVA)에 입학하게 됩니다.

스무살의 해링이 처음으로 마주한 뉴욕은 지금의 휘황찬란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도시의 치안은 엉망이었고, 그가 매일같이 타야 했던 지하철은 범죄와 공포의 대명사였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혼돈과 무질서는 가난한 젊은 예술가들에게 기회의 땅이었지요. 거리에서는 힙합, 펑크 록, 그래피티 같은 날것의 문화가 폭발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로 치면 홍대 앞에서 인디 문화가 처음 폭발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해링은 도시의 벽을 뒤덮은 그래피티에 푹 빠졌습니다. 그곳에는 어린 시절부터 집착했던 ‘선’의 에너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1980년 시각예술학교를 중퇴한 직후 거리로 나가 그래피티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그래피티 작가들처럼, 그는 자신만의 모양을 만들어냈습니다. 짖는 개와 빛나는 아기의 이미지였지요.

그러던 어느 날, 지하철을 탄 해링은 광고판을 발견했습니다. 그곳에는 광고 기간이 끝나 검은 종이가 덧대어져 있었습니다. 그 순간 해링은 깨달았습니다. 이곳이 바로 자신의 무대라는 것을. 해링은 그 길로 역을 뛰쳐나가 흰 분필 한 상자를 사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검은 패널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미술관
사실 대부분의 사람에게 그래피티의 이미지는 좋지 않습니다. 일단 불법이고, 보기에도 흉하기 때문입니다. 상점 셔터나 담벼락, 고수부지 등에 마치 영역 표시를 하는 것처럼 그린 낙서들은 민폐가 맞습니다. 해링은 조금 달랐습니다. 그는 사용 기간이 끝난 광고판 위에, 언제든 지워질 수 있는 분필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실제로 해링의 그림은 곧 다른 광고로 덮이곤 했습니다. 게다가 그의 그림은 재미있고 발랄했습니다. 누구나 그릴 수 있는 그림이지만, 그 전에 해링처럼 그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해링은 밑그림 없이 빠르고 리드미컬한 선으로 하루에 40여 점의 그림을 쏟아냈습니다. 그의 그림은 쉬웠습니다. 복잡한 설명 없이도 사랑과 기쁨, 평화와 연대 같은 보편적인 감정을 이야기했습니다. 단순해서 더 좋았습니다. 인종이나 성별을 알아볼 수 없는 해링의 그림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그렇게 그의 그림은 삭막한 뉴욕의 출근길에 위로와 즐거움을 주는 선물이 되었습니다.



그게 바로 해링이 원하던 일이었습니다. 미술은 고상한 지식인이나 부자들의 전유물이 결코 아니라는 게 해링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모두가 예술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계속 지하철과 거리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물론 해링의 행동은 엄연한 불법이었습니다. 그는 매일같이 경찰과 숨바꼭질을 벌였고, 공공기물 훼손 혐의로 수없이 체포됐습니다. 하지만 웃지 못할 드라마가 펼쳐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그가 수갑을 찬 채 경찰서에 끌려갔을 때, 그에게 여러 경찰이 모여 악수를 청한 겁니다. “키스 해링이신가요? 팬입니다.” 그의 예술은 이미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만의 리그를 넘어
영원히 그렇게 지하철에 그림을 그릴 순 없었습니다. 어쨌든 불법이었고, 사람들이 그의 지하철 드로잉을 떼어간 뒤 비싼 값에 팔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기 그림이 다시 부자들의 전유물, ‘그들만의 리그’로 돌아가는 것을 본 해링은 결심합니다. “이럴 바에야 내가 직접 작품을 팔겠다. 모두가 살 수 있는 가격으로.”



1986년 그는 자기 작품을 티셔츠, 배지, 포스터로 만들어 파는 ‘팝 숍(Pop Shop)’을 열었습니다. 가격은 수천 원에서 수만 원 수준. 저렴한 배지는 불과 수백 원에 살 수 있었습니다. 비평가들은 ‘예술을 상품으로 만든다’며 맹비난했습니다. 하지만 해링은 단호했습니다. “나는 가난한 동네 아이들도 내 작품을 집에 가져갈 수 있었으면 한다.” 돈이 목적이었다면, 그는 작품을 조금만 그려서 비싸게 판매할 수도 있었습니다. 유명 브랜드의 광고를 맡아 어마어마한 부자도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해링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수없이 많은 광고 의뢰가 쏟아졌습니다. 돈을 벌고 싶었다면 전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상업 디자이너 겸 일러스트레이터가 됐을 거예요.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저는 그림을 그리는 게 좋습니다. 작업이 아주 잘 될 때, 저는 현실을 넘어섭니다. 나라는 사람을 완전히 뛰어넘어 이 세상, 우주 전체에 접근합니다.” 그가 원하는 건 예술 그 자체였고, 그렇게 그린 작품으로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예술은 곧 세상을 바꾸는 무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해링에게는 베니라는 조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능한 조수였던 그는 크랙 코카인(싸구려 마약의 일종)에 중독되며 삶이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충격받은 해링은 버려진 핸드볼 코트 벽에 거대한 벽화를 그렸습니다. 내용은 이랬습니다. “마약은 인생을 망친다 (Crack is Wack)”. 그는 즉시 체포됐지만, 언론과 대중은 그를 ‘민중의 영웅‘이라 부르며 지지했습니다. 결국 뉴욕시는 벽화를 지우는 대신, 공식적으로 그에게 다시 그려달라고 요청하는 이례적인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의 선이 도시를 움직인 것입니다.




예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신념은 남아공의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그림으로 이어졌습니다. 거대한 검은 형상이 자신을 억압하는 작은 흰 형상을 짓밟는 승리의 이미지는, 누가 봐도 이해할 수 있는 직관적인 포스터였습니다. 그의 작업은 독일의 베를린 장벽을 허무는 그림으로, 전 세계 어린이 병원의 벽화로 이어졌습니다. 처음에 해링을 무시했던 미술계도 그를 거장으로 평가하며 열렬한 러브콜을 보내왔습니다.
마지막 불꽃
1980년대 후반, 영원할 것 같던 파티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습니다. 앤디 워홀, 장 미셸 바스키아 등 친하게 지내던 예술가들이 세상을 떠났고, 10월에는 뉴욕 증시가 대폭락했습니다. 한 시대가 저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에이즈가 예술계를 덮쳤습니다. 에이즈는 해링의 친구들을 비롯해 뉴욕의 예술과 패션, 공연계에서 빛나는 재능을 하나둘씩 앗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988년, 그에게도 비극이 찾아왔습니다. 에이즈 진단을 받은 것입니다. 당시로서는 사형선고나 다름없었습니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에 그는 무너졌습니다. “처음엔 완전히 망가졌어요. 이스트 리버에 가서 계속 울고 또 울었죠. 하지만 그 후에는 정신을 차리고 계속 살아가야 해요. 바로 그 순간이 끝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죠.” 하지만 절망의 끝에서 결국 그는 다시 붓을 들었습니다.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직감한 그의 마지막 몇 년은 그 어느 때보다 폭발적인 에너지로 가득 찼습니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예술은 삶보다 더 중요하다.” 그의 예술은 이제 에이즈에 대한 사회의 무관심과 혐오에 맞서는 간절한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병이 진행될수록 그는 쇠약해져서 펜을 제대로 잡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1989년, 그는 자신이 떠난 뒤를 위한 준비를 시작합니다. ‘키스 해링 재단’의 설립이었습니다. 재단의 목표는 해링의 작품을 보존하며 그 수익으로 전 세계의 소외된 어린이들과 에이즈 관련 단체를 돕는 것. 해링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자신의 예술이 계속해서 세상을 위한 선물이 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생애 마지막, 그는 인터뷰에서 담담히 말했습니다. “후회는 없습니다. 죽음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고, 언젠가는 일어날 일입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진심으로 받아들인다면 죽음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만이 중요합니다.”

이듬해인 1990년, 해링은 32세의 젊디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 중 하나는 자신을 상징하는 ‘빛나는 아기(Radiant Baby)’였습니다. 그 아기처럼, 해링은 짧은 삶을 살며 순수하고 희망적인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이제 해링의 그림은 우리 모두에게 친숙합니다. 그의 재단은 여전히 아이들을 돕고 있고, 작품은 일상 곳곳에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습니다. 예술은 특별한 누군가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라는 사실을 전하면서요.



**이번 칼럼은 Radiant: The Life and Line of Keith Haring(Brad Gooch 지음), HARING(알렉산드라 콜로사 지음, 김율 옮김), 키스 해링 재단 홈페이지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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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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