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명 대통령이 "금산분리 완화를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지난 1일 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CEO)를 만난 자리에서다. 금산분리는 산업 자본과 금융 자본을 분리하는 규제로 1982년 도입됐다. 이 대통령은 금산분리 완화 검토가 필요한 이유로 '반도체 투자재원 확보'를 꼽았다. 금산분리와 반도체는 무슨 연관이 있을까. 이 대통령 발언의 배경을 살펴보려면 SK하이닉스 얘기부터 시작해야 한다.

기사회생의 동아줄이 된 건 HBM이다. 2022년 말 생성형 AI 시대가 열리며 HBM 수요가 본격적으로 폭발하기 시작했다. 2023년부터 2024년까지 HBM 큰손 엔비디아 주문을 사실상 독식하면서 메모리 보릿고개를 가까스로 넘었다. 2024년엔 23조4673억원 흑자로 돌아섰다.
하지만 다운턴 2년간의 상처는 컸다. SK하이닉스의 재무구조와 투자 여력은 약해졌다. 2022년과 2023년 2년 연속 '마이너스 4조원'대를 기록한 잉여현금흐름(FCF), 2023년 3조5021억원까지 줄어든 현금 및 현금성 자산이 말해준다.

그래서 생각해낸 게 반도체 설비투자를 위한 펀드 조성이다. SK그룹이 반도체 공장을 짓거나 장비를 사기 위한 특수목적회사(SPC)를 세우고 블랙록, 블랙스톤 같은 대형 외국계 투자회사의 투자를 받는 펀드를 만드는 것이다. 이를 통해 나오는 이익은 투자자에 배분한다. 회사가 이익을 독식하는 것보단 못하지만 돈이 없어 생산능력을 못 늘리고, HBM 주문을 경쟁사에 넘겨주는 것보다 나은 것이다. 반도체 투자 펀드 논의는 SK그룹 최고위급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안으로 법적으로 허용된 투자회사인 기업형벤처캐피털(CVC)을 설립해도 규제에 따른 한계가 명확하다. SK그룹 지주사가 CVC를 자회사로 두려면 지분 100%를 보유해야 한다. 외부 자금 비중은 펀드 총출자액의 40% 이내로 제한된다. 해외투자는 CVC 총자산의 20% 범위에서만 허용된다. 총수 일가 지분 보유 기업이나 그룹 계열사에는 투자할 수 없다.
SK그룹이 최첨단 반도체 공장 한 기를 짓는데 필요한 약 30조원을 조달하기 위한 반도체 투자 펀드를 조성하려면, 투자액의 60%인 18조원을 자체적으로 마련해야 한다. 주력 사업 불황으로 현금 조달 능력이 떨어져 있는 SK그룹 입장에선 쉽지 않은 '거금'이다. 해외투자 규제 때문에 미국 웨스트라피엣 HBM 공장이나 중국 우시 D램, 대련 낸드플래시 공장 투자에도 제한이 있다.
자금이 풍부한 은행의 비금융회사 출자 한도 규제도 펀드 활성화를 막는 요인으로 꼽힌다. 은행법에 따르면 은행의 비금융회사 출자는 15%(비상장사 30%) 이내로 제한된다. 간접투자라 하더라도 금융사가 출자자(LP)로 참여한 펀드가 특정 기업에 대규모로 투자하면 출자 한도 규제에 저촉될 수 있다.
금산분리 완화 필요성을 절감한 SK는 그룹 차원에서 정부와 정치권 설득에 나섰다. AI 시대 전략 물자로 부상한 메모리반도체의 중요성이 커지는 상황에서 한국 기업에 대한 지원 필요성이 커지자 정치권과 관가가 움직였다. 이 대통령이 결국 '규제 완화 검토' 발언을 내놓은 것이다.

그룹 별로는 온도차가 있다. 자금 동원 능력이 상대적으로 뛰어난 삼성전자는 SK그룹보다는 펀드 조성을 통한 설비투자에 미온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는 매년 SK하이닉스의 2배 수준의 설비투자(CAPEX)를 진행 중이다. 현금 및 현금성 자산은 올 상반기 기준 약 100조원으로 SK하이닉스(약 17조원)의 6배 수준이다. 다만 삼성전자 역시 투자 수단이 다양화한다는 점에서 금산분리 완화를 긍정적으로 보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이 대통령이 AI·반도체와 같은 첨단산업으로 투자처를 제한했고, 독점 폐해가 없는 경우 등 '안전장치'를 조건으로 건 만큼 규제 완화를 적극적으로 검토할 필요성이 크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대기업 특혜 프레임에 갇혀있기보단 '글로벌 반도체 경쟁'이란 보다 넓은 시각에서 국가 대표 기업을 지원해야 한다는 얘기다.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