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대 황모씨는 올해 경기 광명시의 한 노후 아파트를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아 대출)로 사들였습니다. 신혼부터 서울 신축 아파트에서 전세살이를 해왔지만, 점차 전셋값이 오르면서 낡은 아파트라도 내 집을 마련해야겠다는 결심이 섰기 때문입니다.
내 집 마련에 성공했다는 기쁨도 잠시, 가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던 남편의 행동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이전에는 콧노래까지 하며 곧잘 맡아주던 설거지를 노골적으로 꺼리게 된 것입니다. 황씨는 "다른 가사는 함께 하면서도 주방에만 가면 허리가 아프다고 한다"며 "똑같은 설거지를 하는데 갑자기 허리가 아프다고 하니 이해하기 어려웠다"고 토로했습니다.
문제는 싱크대 높이에 있었습니다. 1989년 지어진 황씨의 아파트에 설치된 싱크대 높이는 80㎝에 그칩니다. 과거 155㎝가 채 되지 않았던 한국 여성 평균 신장에 맞춘 것인데, 160㎝인 황씨에게는 대수롭지 않았지만, 키가 177㎝인 그의 남편에게는 극복하기 어려운 문제였던 셈입니다.
황씨는 "영끌로 집을 마련하며 부족해진 자금 형편 때문에 도배와 장판, 새시만 하고 나머지 인테리어는 손대지 않았다"며 "업체에 알아보니 단순히 높이만 높인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어서 주방 공사를 다시 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이라고 털어놨습니다.

국가기술표준원에 따르면 1990년대 이전까지 주방 싱크대 높이는 80㎝가 일반적이었습니다. 1979년 국민 인체 조사에서 여성 평균 신장은 154.3㎝였는데, 당시만 하더라도 주방은 금남의 공간이었기에 여성의 키에 맞춰 주방 가구들의 높이가 정해졌습니다.
마지막 조사인 2021년 남녀 성인 평균 신장은 각각 174·161㎝로 집계됐습니다. 1979년 첫 조사에 비해 남성은 8㎝, 여성은 7㎝ 커졌습니다. 여성의 경우엔 허리 높이가 94㎝에서 98㎝로 4㎝ 커지는 데 그쳤지만, 남성의 허리 높이는 99㎝에서 106㎝로 7㎝나 높아졌습니다. 낮은 싱크대를 사용하려면 허리를 숙여야 하기에 통증이 동반됩니다.
하지만 일반 주택이나 가구 매장에서 접하는 주방 싱크대 높이는 아직도 80~85㎝가 많습니다. 1995년 한국주택가구협동조합이 단체표준을 통해 가정용 싱크대 높이를 85㎝로 규격화했기 때문입니다. 한국주택가구협동조합의 부설연구원인 한국가구시험연구원도 같은 높이를 표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용자 신장에 맞는 싱크대 높이는 얼마일까요. 보편적으로 사용자 신장의 52% 높이가 적절하다는 것이 인테리어 업계의 중론입니다. 사용자 키 절반에 5㎝를 더하면 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두 공식의 차이는 크지 않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계산하면 키가 160㎝인 사람에게는 83㎝, 165㎝라면 86㎝, 170㎝인 사람은 88㎝, 175㎝에는 91㎝, 180㎝는 93㎝가 적당하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에 일부 건설사들은 신축 아파트에서 표준보다 높은 싱크대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삼성물산과 DL이앤씨, 롯데건설 등은 신장이 큰 주부와 요리를 즐기는 남편 등을 위해 주방 싱크대와 작업대 높이를 89~90㎝로 높일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한 건설사 관계자는 "재건축·재개발 조합에서 싱크대 높이를 다양하게 고를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하는 경우가 많다"며 "결론적으로는 85㎝보다 높은 싱크대가 필요하다는 것이어서 높이 자체를 개선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신축 아파트에서는 처음부터 높이가 높은 싱크대를 설치할 수 있지만, 노후 아파트 싱크대 높이를 높이려면 대대적인 공사를 해야 합니다. 한 인테리어 업체 관계자는 "하부장 다리 높이만 높이면 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다"며 "그러면 비용도 얼마 들지 않겠지만, 사용하며 큰 불편을 겪게 된다"고 지적했습니다. 하부장이 높아지는 만큼 상부장과의 거리가 가까워지기 때문입니다.
인테리어 업계에서는 상부장과 하부장 사이 거리를 60㎝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설거지와 요리 활동을 하는 데 그 정도 공간은 있어야 불편하지 않다는 이유입니다. 하부장이 10㎝ 높아지면 상부장도 10㎝ 높아져야 하는 셈입니다.
이 관계자는 "신혼부부들이 노후 아파트를 매수하면 인테리어를 대대적으로 바꾸는 일이 많다"며 "부부의 신장에 맞춰 주방 공사를 하게 되면 수백만원에 달하는 비용이 들지만, 만족도는 매우 높다"고 설명했습니다.
오세성 한경닷컴 기자 ses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