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 들어 글로벌 주식 시장에서 미국의 투자금이 유럽 및 신흥시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해당 투자금이 저평가된 시장을 찾으면서다. 다만 인공지능(AI) 분야 등의 일명 ‘메가캡 기술주’의 투자는 미국에서 계속 몰리는 모양새다. 올 하반기에는 AI 버블 붕괴, 중국 경제 경착륙 가능성 등이 글로벌 주식 시장에서 리스크 요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올해 미국 정부의 통상·재정 정책이 미국 시장에서 리스크를 키웠다는 분석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취임 직후 대규모 관세 부과로 글로벌 무역전쟁을 촉발했다. 최근 중국과 합의하는 등 관련 우려가 덜해졌지만 경기 침체와 미국 부채 급증에 대한 투자자의 걱정은 여전하다. 최근 무디스가 미국 국가신용등급을 하향 조정하는 등 미국 국채 시장에 압박을 가하기도 했다.

이달 중순 기준 MSCI 미국 지수의 12개월 선행 주가수익비율(PER)은 20.4배였다. 유럽(13.5배)과 아시아(14.2배)보다 높았다. 미국 주식은 비싸고 유럽과 아시아는 싸다는 얘기다. 시장조사업체 모닝스타의 애널리스트 마이클 필드 전략가는 “이번 자금 이동은 처음엔 밸류에이션 매력 때문이었지만 이제는 미국 행정부의 행보에도 투자자가 동요하면서 본격적인 추세가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미국을 떠난 투자 자금은 유럽과 신흥시장으로 방향을 틀었다는 분석이다. 지난달 한 달 동안 유럽 주식형 펀드에는 210억달러가 순유입됐다. 올해 누적으로 보면 825억달러이다. 같은 기간 기준으로 4년 만에 최대치를 기록했다. 같은 기간 신흥국 주식 ETF 292개에도 36억달러가 유입돼 올 5월 누적 기준 111억 달러의 순유입을 나타냈다.

유럽으로 투자 유입 요인은 복합적이다. 우선 통화정책과 재정부양에서 유럽이 미국보다 완화적이다. 유럽중앙은행(ECB)은 경기 침체를 우려해 최근 1년간 8차례 금리를 인하했다. 독일은 지난 1분기에 1조 유로 규모의 재정 부양책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이런 영향으로 유로화 가치가 달러 대비 1.07달러 선까지 상승하는 등 통화 강세도 나타났다. 미국발 무역 갈등으로 유럽 각국이 자국 방위와 산업에 투자를 확대한 것도 방산 기업 중심으로 유럽 주가를 끌어올렸다. 독일의 대표 주가 지수(DAX)와 유럽 스톡스(Stoxx) 50 지수는 올해 모두 연중 신고점을 경신했다.

올해 브라질은 원자재 강세와 정치 안정에 힘입어 MSCI 브라질 지수가 달러 기준 연초 이후 15% 이상 상승했다. 세계 최대 채권운용사 핌코의 프라몰 드하완 신흥시장 포트폴리오 책임자는 "남미는 금리 하락과 건전한 재정으로 투자자금이 몰리는 이상적 환경”이라고 평가했다.
아시아 시장도 주목받았다. 에머 캐피털 파트너스의 마니쉬 레이차우두리최고경영자(CEO)는 "아시아 신흥국 시장은 유럽보다 미국 자본 유출의 혜택을 더 잘 받을 수 있다"며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은 부채 부담이 증가하는 반면 많은 아시아 경제는 재정 부담이 적어 채권 수익률은 안정적이고 투자자의 신뢰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고 말했다. 아시아 신흥시장이 최근 내수 소비 중심으로 경제 구조를 재편하면서 대외 충격에 이전보다 강해했다는 평가도 있다.
대만도 올해 들어 외국인 증시 순매수가 늘었다. 올 4월까지는 대만 증시에서 자금이 빠져나갔다. 하지만 지난달 흐름이 바뀌어 44.3억 달러의 외국인 순매수가 집계됐다. 이는 인도에 같은 기간 유입된 금액의 약 2.5배에 달하는 규모다. 대만 자금 유입의 배경으로 반도체 경기 회복과 중국 리스크 완화가 꼽힌다.
핌코는 신흥국 통화 채권에서도 사상 최대의 자금이 유입됐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글로벌 투자자들이 달러 약세에 베팅하고 있다고 분석이다. 올해 들어 달러 가치를 보여주는 지표인 달러인덱스는 10% 하락했고 주요 신흥국 통화는 7% 정도 절상되는 등 통화 흐름도 바뀌었다.

이런 변화로 글로벌 시가총액 상위권 명단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프랑스의 LVMH와 영국의 HSBC 등이 시총 10위권에 진입하며 존재감을 보였다. 인도의 '릴라이언스 인더스트리'와 TCS 등도 글로벌 상위권으로 부상했다. 반면 과거 상위권을 지배했던 미국 기술주들은 AI 기업 등을 제외하면 상대적으로 부진한 모습이었다. 다만 이달 들어 미국의 기술주 랠리가 다시 시작하면서 애플, 마이크로소프트(MS), 엔비디아 등은 글로벌 1~3위 기업을 다투고 있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인 블랙록은 올해 전망에서 “신흥시장 주식을 선진시장보다 선호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인도 등을 거론하며 신흥시장이 구조적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블랙록은 최근 미국 무역 정책에 대해선 "투자자들이 미국 국채와 달러의 안전자산 지위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신흥국 부채 리스크도 커지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등에 따르면 26개국의 13억 인구가 이미 외부 자금조달보다 부채 상환에 더 많은 자금을 지출하고 있다. IMF는 "2020~2021년 코로나19 충격으로 부채가 급증했고 글로벌 금융 환경의 긴축이 더하면서 많은 신흥시장과 개발도상국의 부채 상환 부담 증가는 증가했다"고 설명했다.
'AI 버블'이 붕괴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엔비디아, 팔란티어 등 일부 AI 기업은 지속 불가능한 밸류에이션을 기록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AI 기업의 고평가 핵심 근거는 ‘AI 총 유효시장(TAM) 폭발'인데 관련 성장률과 마진 추정치가 현실화하지 않을 경우에는 AI 버블이 터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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