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바로가기

뉴스인사이드

"도대체 뭘 봤길래"…연극 보던 군인들 들고 일어난 이유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글자작게 글자크게 인쇄 목록으로

서울에 왔다, '표현주의 천재 화가'
코코슈카와 오펜하이머
'폭풍 부는 영혼'의 풍경화
세계 예술 뒤흔든 표현주의 뭐길래



“야, 저게 대체 뭐 하는 짓이야? 당장 멈춰!”

1909년 오스트리아 빈의 쿤스트샤우 극장. 무대 위에서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을 잔인하게 공격하는 순간, 객석에서 분노에 찬 고함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 중심엔 인근 군부대에서 외출을 나와 연극을 관람하던 군인들이 있었습니다. 극도의 흥분 상태에 빠진 이들은 관객석 경계를 무너뜨리고 무대 위로 올라갔습니다. 연기를 하던 배우들이 놀라 도망가면서 연극은 중단됐지만 혼란과 공포, 분노는 들불처럼 번졌고, 큰 소란이 벌어졌습니다.

경찰이 이 사태의 원인으로 지목한 남자는 표현주의 예술의 대가 오스카 코코슈카(1886~1980). 소란의 주동자가 아니라, 연극 포스터를 그리고 극본을 쓴 예술가였습니다. 죄목은 “사람들의 감정을 격렬하게 자극했다”는 것. 연극 극본을 쓴 게 무슨 죄가 되나 싶지만, 그의 작품에는 그만큼 인간의 감정을 자극하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경찰청장까지 닿는 인맥 덕분에 코코슈카는 체포를 간신히 면했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그는 ‘문제아들의 우두머리’라는 별명을 얻습니다.

코코슈카가 누구고 어떤 작품을 만들었길래, 표현주의라는 게 대체 뭐길래 이런 일까지 벌어졌을까요. 오늘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표현주의, 그리고 오스트리아에서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두 천재 예술가를 다룹니다.
이번 주에도 평소처럼 칼럼을 연재해도 될지를 깊이 고민했습니다. 불안한 시국과 관련 없는 다소 한가한 이야기니까요. 하지만 2년 반 동안 이어져 온 이 칼럼을 매주 기다리시는 분들이 계시는 만큼 이번에도 연재를 이어가기로 했습니다. 글을 읽는 잠시나마 마음을 쉬어가셨으면 합니다.
영혼에 상처를 내는 남자, 코코슈카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지금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특별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에곤 실레와 구스타프 클림트를 필두로 한 오스트리아 거장들의 200점 가까운 걸작들을 한국에서 소개하는 전시입니다. 연일 매진 행렬을 이어가고 있는 이 전시 관람평에서 눈에 띄는 반응들이 있습니다. “실레와 클림트를 보러 왔다가 코코슈카에게 반했다”는 관람평입니다. 그만큼 코코슈카의 작품은 강렬하고 인상적입니다. 국내에 이름이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코코슈카는 20세기 초 가장 중요한 미술 사조로 꼽히는 ‘표현주의’의 대표적인 선구자 중 하나로 꼽히는 대가입니다. 그렇다면 표현주의란 뭘까요.



표현주의란 한 마디로 ‘자기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 색채와 형태를 과장하고 왜곡해서 그리는 것’입니다. 풀어서 설명해보겠습니다. 살다 보면 힘든 일이 많습니다. 사랑에 실패했을 때, 가족이 아플 때, 구직 면접에 낙방했을 때, 혼자 힘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우울함에 사로잡혔을 때처럼요. 그 때의 마음을 말로 표현하면 슬픔, 좌절, 번뇌 정도가 됩니다. 하지만 이걸로는 부족할 때가 많습니다. 이런 흔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훨씬 더 강렬하고 복잡한 마음의 상태. 그걸 그려낸 ‘영혼의 풍경화’가 표현주의 그림입니다.

형태를 마구 바꿔버리고, 눈에 거슬릴 정도로 선명한 색을 쓰는 이런 ‘이상한 그림’이 갑자기 뜬금없이 등장한 건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아는 모네와 고흐에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나오는 게 표현주의기 때문입니다.



사진이 발명된 이후 화가들은 ‘실제와 똑같이 그리는’ 걸 포기했습니다. 어차피 사진을 이길 수가 없으니까요. 대신 화가들은 ‘그림만이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등장한 미술 중 가장 큰 성공을 거둔 게 인상주의입니다. 모네 등 인상주의자들은 ‘순간의 느낌’을 그림으로 표현하려 했습니다. 고흐와 고갱의 ‘후기 인상주의’는 거기서 한 발 나아간 것. 이들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에서 벗어나 대상에 자신의 ‘감정과 스타일’을 덧씌웠습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발전해, 현실의 비중을 낮추고 마음 속 감정과 스타일을 훨씬 강력하게 표현한 게 표현주의입니다. 이번 전시에 나온 코코슈카와 실레는 표현주의의 대표 선수였지요.

그런데 아까 표현주의를 ‘영혼의 풍경화’라고 설명했습니다. 사실 자기 마음이 아주 고요하고 평화로운 사람은 이런 예술을 할 필요가 없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자기 내면을 그린다면 보는 입장에서는 아주 평온하지만 재미없는 그림이 되겠지요. 제어할 수 없는 격렬한 감정과 열정이 마음 속에서 소용돌이쳐서, 이걸 어떻게든 표현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사람만이 표현주의 작품을 그리게 됩니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성격이나 인성에 좀 문제가 있어야 매력적인 표현주의 작품을 그릴 수 있습니다. 코코슈카가 그랬습니다.



코코슈카는 그야말로 문제아였습니다. 시작부터가 범상치 않았습니다. 미술계에 그의 이름을 처음으로 알린 사건은 청소년의 성(性)을 다룬 작품을 발표해 미술학교에서 퇴학당한 것이었습니다. 이후 그는 특유의 기괴하고 왜곡된 화풍으로 그림을 그려댔습니다. 캔버스에 물감을 칠한 뒤 마르기 전에 이를 붓의 손잡이로 긁어서 휘젓고, 사람의 얼굴과 배경을 얼룩덜룩하게 그려 넣고, 바늘로 다시 긁어내고…. 그의 기법과 그림은 너무 강렬해서 야만적으로 보일 정도였지만, 놀랍게도 이는 정교한 붓칠과 만나 강렬함과 세련미를 겸비한 작품을 만들어냈습니다.

“정신 착란의 초상화를 그리겠다.” 강하고 멋있게, 즉 ‘있어 보이게’ 말하기를 좋아했던 코코슈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쉽게 말해 단순히 상대방의 외모만 그리는 게 아니라, 내면에 숨겨진 불안과 광기, 욕망까지 담아내는 게 목표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수군댔습니다. “악마의 재능이다. ‘엑스레이 눈’으로 사람의 잠재의식을 꿰뚫는 것 같다.” 클림트는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젊은 세대 화가 중 가장 위대한 재능을 지니고 있다.” 성(性)적인 것, 병(病)적인 것, 죽음과 같은 본질적인 문제들을 다뤘던 클림트에게 코코슈카의 예술은 그야말로 반갑게 다가왔을 겁니다.



“코코슈카는 상대방에게 길고 가늘게 상처를 낸 뒤 거기서 영혼을 끄집어내 그리는 사람이다.” 한 평론가(알베르트 에렌슈타인)는 그를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확실히 그의 그림은 탁월했습니다. 하지만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런 ‘흉흉한 마음’을 그리는 사람이 옆집에 산다면 어떨지를요. 왠지 피곤한 일이 많을 것 같지 않나요. 실제로 코코슈카와 친한 사람 중 상당수는 그의 기행과 괴팍한 성격에 학을 뗐습니다. 예술가 동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피해자가 막스 오펜하이머(1885~1954)였습니다.
오펜하이머, 에곤 실레를 깨웠지만


‘오펜하이머’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보통 떠올리시는 인물은, 핵무기 개발에 참여한 미국의 과학자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일 겁니다. 지난해 그에 관한 영화가 오펜하이머라는 제목으로 개봉해 큰 인기를 끌기도 했지요. 하지만 미술에서도 오펜하이머라는 이름의 중요성은 아주 큽니다. 한스 페터 비플링어 레오폴트미술관장이 “에곤 실레, 오스카 코코슈카와 함께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고 소개한 화가가 바로 막스 오펜하이머입니다. 이번 전시에는 그의 그림 두 점이 코코슈카의 그림과 나란히 걸려있습니다.

빈에서 예술 수집가의 아들로 태어나 화가가 된 오펜하이머는 1908년, 클림트의 유명한 작품 ‘키스’가 처음 세상에 나온 전시회에 자기 작품을 함께 걸면서 미술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역시 코코슈카와 마찬가지로 인물의 정신과 본질을 초상화에 담는 게 목적이었습니다. 같은 도시에 살던 ‘정신분석학의 아버지’,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만나고 나서 깨달음을 얻은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술가는 눈에 보이는 얼굴과 사물의 뒤편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오펜하이머는 황토색을 중심으로 다소 어두운 색채를 썼습니다. 코코슈카보다는 덜 강렬했지만, 그만큼 심리 상태를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지요. 그래서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내면의 광채가 인물의 몸을 감싸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펜하이머는 실레의 스타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인물이었습니다. 비플링어 관장은 “실레가 클림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화풍을 찾도록 큰 도움을 줬다”고 말합니다. 예술 뿐 아니라 사적으로도 실레와 오펜하이머는 아주 친한 사이였습니다. 서로의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기도 했고, 상대방의 초상화를 그려주기도 했습니다. 실레의 그림에서 ‘손’이 두드러지는 것도 오펜하이머가 준 영향입니다. ‘얼굴 다음으로 인간의 마음을 잘 보여주는 신체 부위가 손’이라는 오펜하이머의 철학에서 배운 거지요.



그런데 주목할만한 건, 미술을 전공한 사람들조차 오펜하이머의 이름을 잘 모른다는 겁니다. 실제로 오펜하이머의 이름은 오랫동안 잊혔다가 그가 죽은 지 70년이 다 된 최근 들어서야 주목받고 있습니다. 이게 다 코코슈카 때문입니다.

아까 언급한 것처럼 표현주의 화가들의 성격은 대부분 온화함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이들은 서로 치열하게 경쟁을 벌이며 ‘표현주의 대장’의 자리를 노렸습니다. 오펜하이머는 하필 그중 가장 성격이 모난 사람인 코코슈카에게 찍혔습니다. 코코슈카는 1911년 오펜하이머가 그린 포스터를 문제 삼아 “내 1909년 포스터를 표절했다”고 공격했습니다. “그놈이 천재라느니, 가장 은밀한 영혼의 고통을 본다느니 하는 건 전부 말도 안 된다. 그는 따라쟁이일 뿐이다.” 코코슈카는 자신의 모든 인맥을 동원해 오펜하이머의 작품을 비판하고 전시를 거부하도록 했습니다. 어느새 빈에는 “오펜하이머는 코코슈카의 표절자”라는 말이 널리 퍼졌습니다.




그렇다면 오펜하이머가 코코슈카의 작품을 정말로 표절했던 걸까요. 두 사람의 작품에 공통점이 있는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어떤 천재든, 어떤 혁신이든 갑자기 무(無)에서 생겨날 수는 없습니다. 오펜하이머와 코코슈카는 둘 다 서로의 영향을 받으며 경쟁했습니다. 그리고 각자의 방향으로 발전해나갔습니다. 그 과정에서 조금 비슷해 보이는 작품이 한둘쯤 나오는 건, 지극히 흔한 정상적인 일입니다. 게다가 코코슈카의 ‘상처난 옆구리’라는 주제는 서양 미술에서 수백년간 너무도 숱하게 써온 주제였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원래 분위기에 휩쓸리기 쉬운 존재. 오펜하이머를 비난하는 것이 지식인 사회의 대세로 자리를 잡자, 사람들은 신나게 그를 물어뜯었습니다. 오펜하이머가 동성애자에 유대인이라는 사실은 증오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리고 오펜하이머의 감수성은 너무도 예민했습니다. 결국 그는 여론전을 버티지 못하고 빈 미술계에서 모습을 감춘 뒤 훗날 외국으로 자리를 옮겨 활동을 계속하게 됩니다.

표현주의가 남긴 것들
코코슈카는 왜 이렇게까지 오펜하이머를 공격했을까요. 자신의 연애가 잘 안 풀려서 불안과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던 게 중요한 원인일 수 있습니다. 당시 코코슈카의 연인은 알마 말러.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천재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의 생전 부인이자, ‘마성의 연인’이었습니다. 사교계의 중심이던 알마는 코코슈카와 사귀면서도 수시로 다른 예술가들과 바람을 피웠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코코슈카는 아마도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강조해 매력을 어필하고 싶었을 겁니다. “내가 가장 위대한 예술가니까, 나에게 집중해”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애꿎은 오펜하이머를 희생시키고 온갖 노력을 기울여 알마를 잡으려고 했지만, 알마는 자신에게 병적으로 집착하는 코코슈카에게 질리고 말았습니다. 결국 알마는 코코슈카를 버리고 맙니다. 코코슈카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알마와 결별한 이후에는 알마를 닮은 인형을 만들어 몇년동안 데리고 다니며 지역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오펜하이머는 비록 상처를 입긴 했지만, 스위스와 독일 등을 오가며 작품 활동을 계속 이어갑니다. 독일에 있던 시절에는 꽤 성공을 거두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끝은 좋지 않았습니다. 독일에서 나치가 집권한 이후 유대인이었던 그는 미국으로 이주했지만, 미국 예술계는 그의 이름을 잘 몰랐습니다. 가난과 무관심에 시달리면서도 계속 그림을 그리던 오펜하이머는 1954년 뉴욕에서 외롭게 세상을 떠납니다.

재미있는 건 두 사람의 화풍 변화입니다. 순탄한 삶을 산 건 아니지만, 두 사람 모두 나이가 들고 여유를 찾은 시기에는 화풍이 확연히 부드러워집니다. 좋게 말하면 독기가 빠지면서 편안하고 부드러워졌고, 솔직하게 말하면 번뜩임이 사라지고 평범해졌습니다. 작품에만 한정했을 때, 이들의 가장 빛났던 시절은 1910년을 전후한 질풍노도의 시기였습니다.

결국 그다음 시대 미술의 주류는 또 다른 질풍노도의 젊은 문제아들이 차지하게 됩니다. 물감을 마구 뿌리는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을 비롯해 세계 미술의 주류가 된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자들, 나치 경례를 주제로 문제적 작품을 발표한 안젤름 키퍼로 대표되는 독일의 신표현주의자들이었습니다. 다만 추상‘표현주의’, 신‘표현주의’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그 뿌리에는 표현주의가 있었지요.




도대체 왜 이따위 식으로 붓칠을 하는 걸까,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불편한 그림을 왜 그리는 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게 좋다는 사람들은 왜 그러는 걸까. 표현주의를 처음 접한 이들이 마음 속으로 떠올리는 질문입니다. 여기엔 이렇게 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간의 천성, 본연의 에너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마음 속에 충동적인 기질과 어두운 면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내면의 괴물’이 굉장히 강력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건 본인의 잘못도 아니고, 고칠 수도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꼭 나쁘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인간의 문명은 광기에 맞닿은 열정을 동력으로 바꿀 때 한 걸음 나아가니까요. 스티브 잡스, 일론 머스크와 같은 대단한 혁신가이자 경영자들이 개인적인 인성이나 도덕성에서 아주 별난 면을 많이 갖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예술은 인간 본연의 그 격렬한 에너지가 가장 노골적이면서도 아름다운 방식으로 표출되는 곳입니다. 다른 분야와 달리 예술에서는 그 모든 격정을 온전히 터뜨리는 게 허용됩니다. 표현주의는 그걸 가장 잘 보여주는 미술 사조 중 하나입니다.

감정이 격렬하면 격렬할수록 표현주의 예술은 강렬한 광채를 내뿜고, 예술가가 사라져도 그 빛은 영원히 계속됩니다. 그래서 미술사학자 노르베르트 볼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훌륭한 예술 작품 속에는 인간의 감정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충격적으로 되새기게 해주는 것, 그것이 바로 표현주의다.”

*국립중앙박물관 전시는 3월 3일까지 이어집니다.


**최근 기자가 출간한 책 <명화의 발견, 그때 그 사람>에서 코코슈카의 기막힌 사랑 이야기를 자세히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클림트,실레, 게르스틀 등 국립중앙박물관 전시 주요 작가들의 삶과 작품세계를 비롯해 레오나르도 다빈치·미켈란젤로·라파엘로의 경쟁 이야기, 폴 세잔과 고갱 등 다른 대가들의 이야기도 함께합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서점,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 굿즈샵에서 만나실 수 있습니다.

***이번 기사 내용은 Max Oppenheimer: Expressionist of the first hour(Hans-Peter Wipplinger 등 지음), Oskar Kokoschka: A Life(Frank Whitford), Art in Vienna 1898~1918: Klimt, Kokoschka, Schiele and their contemporaries(Peter Vergo), 국립중앙박물관 전시 도록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6만여명 독자가 선택한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오늘의 신문 - 2024.12.27(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