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계엄 사태의 후폭풍이 거세지는 가운데 최근 기획재정부 내부 익명게시판에 '한 명의 돌아이가 어떻게 나라를 망치는가?'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와 눈길을 끌고 있다. 비상계엄 소동 이후 공무원들은 전반적으로 큰 동요 없이 맡은 바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 경제와 사회를 스스로 위기에 빠뜨린 행정부 수반에 대한 분노 역시 감지되고 있다.
해당 글은 비상계엄이 해제된 지난 4일 오후 게재됐다. 글쓴이는 "멀리 갈 것도 없이 어젯밤과 오늘 새벽에 벌어진 일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며 전날(3일) 밤 소동을 언급했다. 핵심 경제부처 공무원으로서 정부 정책들이 블랙홀처럼 빨려들어갈 수 있다는 허탈감과 분노, 이번 사태가 실물경제·금융시장에 미칠 충격파에 대한 우려가 묻어나는 대목이다.
이 글은 "정치 얘기는 (내부 게시판에서) 자제해달라"는 댓글도 달렸지만, 공감을 더 많이 받았다. 다른 작성자는 댓글에서 "공무원은 영혼없이 시켜놓은 것만 기계처럼 하는 존재냐. 누구보다 정치와 사회 이슈에 가까운 직업이면서 정치 얘기를 하지 말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정치적 견해를 내부 게시판에서도 피력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또 다른 작성자는 "잘못하면 우리 모두 아이히만(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부역자)이 될 수도 있다. 그런 일은 없어야 되지 않겠냐"며 현 사태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윤석열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하는 글도 있었다. 한 작성자는 윤 대통령을 향해 "경제를 불확실성에 빠뜨린 행동에 책임을 느끼고 사과가 선행돼야 하는 것은 아니냐"고 지적했다. 이어 "예산안 시정연설부터 패싱해 협의의 길을 아예 차단한 것은 아니냐"고 덧붙였다. 앞서 윤 대통령이 지난 3일 비상계엄 선포 이유로 야당의 예산안 삭감을 들었는데, 진짜 문제는 윤 대통령의 정치력과 협상 의지 부족이라고 비판한 것으로 보인다.
비상계엄 사태 이후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도 중앙부처 공무원들은 대체로 맡은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모습이다. 한 작성자는 "차분하게 일을 하는 게 맞다. 수습하라면 수습하는 게 맞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웃고 떠들고 일하는 와중에도 어딘가가 곤두서 있음을 느낀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비상체제로 근무해야 할 것 같아 앞으로 일이 더 많아질 것 같다"는 우려도 사무관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다.
연금·의료 등 해묵은 개혁 과제들을 맡은 복지부도 뒤숭숭한 건 마찬가지다. 복지부 내부 게시판에도 이번 사태에 대한 비판 글이 몇몇 올라온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복지부는 "대통령이 힘을 실어주는 지금이 연금과 의료개혁의 적기"라며 의지를 불태웠는데 동력이 크게 훼손되며 무력감이 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한편 이날 정부는 그간의 정부 정책과 구조개혁은 흔들림 없이 이어간다는 방침을 밝혔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은 이날 오전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김병환 금융위원장, 이복현 금융감독원장과 함께 긴급 거시경제·금융현안 간담회를 열고 "최근 정치 상황과 관계없이, 그간 정부가 추진해오던 산업경쟁력 강화, 외환·자본시장 선진화 등 중장기 구조개혁 정책들을 흔들림 없이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조규홍 복지부 장관도 이날 오전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를 주재하고 "지역·필수 의료를 살리고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는 것은 미룰 수 없는 정부와 의료진 모두의 사명"이라며 "정부는 의료계와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하며 개혁방안을 지속적으로 마련해 나가겠다"고 했다.
허세민 기자 se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