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름다운 우리의 혼이 담겼다", "이런 '국뽕' 좋다", "자부심이 느껴진다", "가슴이 벅차올라 눈물이 난다", "멋지다! 대한민국"
지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2025 기간 경주 보문호 수상공연장에서 진행된 멀티미디어쇼를 접한 네티즌들의 반응이다. 커다란 보름달을 연상케 하는 지름 15m의 커다란 원형 스크린에서는 20분을 꽉 채워 한국의 과거, 현재, 미래의 대서사가 그려졌다.
흐름은 크게 3개의 장으로 구분됐다. 둥근 달로부터 시작해 첨성대가 과거와 미래를 넘나드는 포털(Portal) 역할을 하면서 출발한 1장에서는 성덕대왕신종의 울림과 함께 영험한 기운이 신라 황금 문화의 시작을 알렸다. 황금알에서 태어난 애벌레(곡옥)가 신라의 황금 문화를 흡수하며 '황금 나비'로 탈바꿈하는 과정을 통해 경주의 유구한 역사와 예술을 묘사했다.
이어진 2장에서는 황금 나비가 한국의 '오한(한지·한복·한식·한글·한옥)'의 문화를 겪으며 다채로운 K-컬처의 색깔을 날개에 품으며 '색동 나비'로 변화했다. 색동 나비는 APEC 회원국을 잇는 화합의 색동 빛으로 세계를 물들이는데, 3장에서 분열과 갈등의 비바람에 부딪혔다. 하지만 이내 희망의 빛을 흡수하며 'AI 나비'로 진화했고, APEC 2025 엠블럼 아래에서 '우리'라는 가치를 표현해냈다.
해당 쇼는 단순히 시간의 흐름을 나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짜임새 있는 서사를 부여해 '한국의 美'를 유연하게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아울러 연결·혁신·번영을 키워드로 삼았던 APEC 2025 메시지도 효과적으로 전달했다.

이는 APEC 2025 문화총감독을 맡았던 이도훈 홍익대 영상·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의 아이디어였다. 이 교수는 2018 평창 동계올림픽 개·폐막식, 2005 부산 APEC 정상 만찬 문화공연, 2011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 개·폐막식, 2002년 한일 월드컵 개막식 등을 이끌었던 국가 메가 이벤트의 총괄 기획 및 연출가다.
APEC 2025는 앞선 이벤트들과 달리, 정국이 어수선한 가운데 준비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당장 물리적인 제약이 따랐다. 약 1년 반 전부터 준비에 돌입했던 2005년 부산 APEC 때와 달리, 지난 2월 문화총감독으로 선임돼 1년이 채 안 되는 짧은 시간이 주어졌다. 본격적인 제작에 들어간 건 초여름부터였다고 한다.
이 교수는 "제안받고 걱정이 되긴 했지만, 우리나라의 콘텐츠 제작 기술이 많이 발전했기 때문에 할 수 있다는 생각도 있었다"면서 "겉으로는 공연을 보여주는 거지만, 이런 메가 이벤트는 국가 브랜드 마케팅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자국민이든, 관광객이든, 국빈급이든 이걸 보고 어떠한 메시지를 느껴야 한다. 국가적으로 무슨 이야기를 할지가 기본 출발"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APEC 2025 문화축전(6개의 경주 보문호 경관쇼, 특별 멀티미디어쇼, 한복패션쇼 등)'을 총괄 지휘했다. 그는 "메가 이벤트를 통해 우리의 저력을 보여줄 때 역사, 문화, 예술, 최첨단 기술, 산업, 경제 모든 게 포함되는데 가장 중요한 건 철학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라면서 이번 행사는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의 사상에서 비롯된 '원융회통(圓融會通)'이 핵심 철학이었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원융회통'이란 서로 다른 모든 것들이 조화를 이루어 결국에는 하나의 '같음'으로 통한다는 거다. 그것이 바로 현재 APEC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가치라고 생각했다"면서 "원융회통의 철학을 드러내기에 가장 중요한 상징은 큰 '원'이었다. 이를 커다란 둥근 달로 표현했다"고 설명했다.



APEC의 주제였던 '연결·혁신·번영'의 키워드는 엠블럼의 상징인 '나비'가 대표했다. 신라의 황금 문화를 상징하는 '황금 나비'부터 K-컬처의 다양성과 확장성을 나타내는 '색동 나비', 미래의 전 세계적인 화합과 연대·연결을 의미하는 'AI 나비'까지 20분 분량의 영상과 멀티미디어들이 끊기는 구간 없이 매끄럽게 이어지며 대한민국, 나아가 세계의 화합을 이야기했다.
특히 색동 나비가 되는 과정이 인상적이다. 한복, 비빔밥, 한옥 단청, 촛대, 훈민정음해례본 등 한국 전통문화의 뼈대를 이루는 오한과 스친 끝에 다채로움을 품은 'K-컬처', 이른바 색동 나비로 발전한다.
이 교수는 "경주는 APEC 개최 도시로서 최고였다. 대한민국의 정수"라면서 "신라의 황금 문화, 경상북도의 오한 등을 표현할 수 있었다. 이번에 이벤트를 해보니 왜 학창 시절 수학여행을 다들 경주로 가는지 알겠더라. APEC도 전 세계 사람들이 경주로 수학여행을 온 것"이라며 웃었다.
이어 "전통문화가 있기에 K팝, K푸드, K뷰티 등 지금의 K-컬처가 나온 것"이라면서 "흩어져 있는 우리의 문화를 잘 쌓아서 전통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전통이 뿌리가 되어 줄기·가지로 뻗어나가고 꽃을 피우는 게 오늘날의 K-컬처다. 산업적으로도 열매를 맺고, 그런 나무들이 모여서 전 세계에 거대한 K-컬처의 미래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평창동계올림픽 개회식에서 드론 1218대를 이용해 대형 오륜기를 표현했던 장본인이다. 그런데도 "정교한 스토리와 이야기 구조가 중요한 거다. 기술은 꼭 숨어야 한다. 드론, 불꽃쇼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이 적재적소에 어떠한 스토리로 어떻게 연출되느냐가 중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국가적 메가 이벤트는 마케팅적 전략과 철학, 밀도 있게 짜인 농축된 스토리텔링이 나온 뒤에야 어떤 공연을 보여줄지 생각해야 한다. 바로 국가 브랜드 마케팅적 기획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이 교수는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 당시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생이 독일 총통 히틀러로부터 받은 월계수나무를 심은 기념수를 활용한 콘텐츠로 감동을 안겼었다.
이번 APEC 2025 현장을 회상하면서는 "손주와 함께 온 할머니가 우는 걸 봤다. 할머니와 손주가 같은 걸 보면서 함께 이해하고 감동하는 게 아주 상징적이지 않나. 외국인들도 감탄하더라. 제가 이 일을 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직접 만든 'IVV' 공식을 강조했다. 고유한 우리의 정체성('I'dentity)을 재해석하고 재배치, 재창조하는 과정을 통해 현재의 동시대인들이 함께 공유하는 가치('V'alue)'로 바꾸고, 마침내 한 발짝 더 나아가 전 세계 공동의 비전('V'ision)'을 제시한다는 뜻의 공식이다.
이 교수는 "이제 리더십, 프론티어십을 보여줘야 한다. K컬처가 잘했다는 건 현재까지의 이야기다. 앞으로의 포스트 K-컬처는 세계인들이 대한민국의 비전과 정신 문화에 함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한국의 문화가 거부할 수 없는 콘텐츠가 되면서 마침내 공동의 비전을 제시하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만의 공동체적 가치관'을 강조했다. 이 교수는 "대한민국이 가진 여러 핵심 가치 중에서 가장 빛나는 게 '우리'라는 말이다. 전 국민이 자발적으로 IMF 때 금 모으기 운동을 하고, 태안 기름 유출 사고 당시 돌을 닦아냈다. 지난 계엄 때는 응원봉을 들고 거리로 나가서 집회를 질서정연한 K팝 문화로 승화시켰다. 참여하지 못 한 사람들은 사비를 들여서 커피나 핫팩을 보냈다. '우리'라는 말 안에는 흥(興)과 정(情)이라는 어마어마한 힘이 있다. 연대와 평화, 자유 등 '우리의 DNA'가 지금의 K컬처를 만들었다. 이 스피릿은 꾸준히 확장해야 생각한다. 한글 원형 자체로 '우리'라는 단어를 알리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광의의 전문 영역으로써 일정 기간 혼신의 힘을 쏟아내야 하는 일임에도 그는 "내 생애 최고의 클라이언트, 영원한 고객은 대한민국"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옛날엔 대한민국을 알리기에 급급했다면 이제는 자신감 있게 보여줘도 되는 때가 왔잖아요. 기술에만 천착하지 않고, 끊임없이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정신과 철학, 스토리텔링을 고민해 나갈 겁니다."
K컬처의 화려함 뒤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땀방울이 있습니다. 작은 글씨로 알알이 박힌 크레딧 속 이름들.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스포트라이트 밖의 이야기들. '크레딧&'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을 하는 크레딧 너머의 세상을 연결(&)해 봅니다.
김수영 한경닷컴 기자 swimming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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