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글로벌 모터 스포츠의 정점이 포뮬러원(F1)의 인기가 한국에서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올해 F1은 맥라렌 레이싱팀이 일찌감치 팀 챔피언인 ‘컨스트럭터 챔피언’을 확정했습니다. 소속 드라이버인 랜도 노리스와 오스카 피아스트리는 ‘드라이버 챔피언’을 놓고 경쟁 중입니다.
영국 슈퍼카 회사 맥라렌은 모터스포츠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차세대 슈퍼카 시장을 선도하고 있습니다. F1에서는 이탈리아 페라리, 영국 애스턴마틴, 독일 메르세데스 AMG, 프랑스 르노 알핀과 같은 각국의 대표 고성능 자동차 제작사들이 자기 기술을 뽐내고 있습니다. 내년에는 미국 럭셔리카의 자존심인 GM의 캐딜락도 참여합니다.
F1에서는 맥라렌에 뒤처지며 자존심을 구기고 있지만 영국의 대표 슈퍼카 지위는 원래 애스턴마틴이 가지고 있습니다. 애스턴마틴은 1913년에 설립된 100년이 넘는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맥라렌은 모터레이싱팀이 1963년, 자동차 제조사가 1985년에 설립된 비교적 젊은(?) 회사입니다.

애스턴마틴은 1913년 라이오넬 마틴과 로버트 뱀퍼드와 함께 창립한 회사입니다. 창립자인 마틴은 그 당시 유명한 자동차 힐클라임 레이스인 애스턴 클린턴 힐클라임(Aston Clinton Hillclimb)과 자신의 이름에서 하나씩 빌려와서 회사를 만들었습니다. 회사 태동부터 자동차 레이스와 연관이 있던 것입니다.
마틴과 램퍼드는 1920년대와 1930년대에 많은 모터스포츠 대회에 나가면서 회사의 명성을 쌓았지만, 지속적인 자금난에 시달리면서 휴업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결국 2차 세계대전 이후 명맥만 간신히 유지하다가 데이비드 브라운에게 매각이 됩니다. 데이비드 브라운은 애스턴마틴을 다시 살려내는 데 성공합니다. 이후 그의 업적을 기리고자 차종 이름에 그의 이니셜을 딴 DB라는 단어가 들어갔습니다.

애스턴마틴이 세계적인 브랜드가 된 것은 영화 007시리즈의 공이 컸습니다. 주인공 제임스 본드가 애용하는 자동차로 자주 채택되면서, 애스턴마틴이 ‘본드카’의 대명사처럼 여겨지게 된 것입니다.
특히 1963년 출시한 DB5는 1964년 작 007 골드핑거에 처음 등장한 이래 무려 9편의 007시리즈에 등장했습니다. 심지어 2021년 개봉했던 007 노타임투다이에서도 다시 복원된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애스턴마틴은 이런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럭셔리 스포츠카 시장에서의 실적은 신통치 못합니다. 창사 이래로 잠깐씩 히트작이 나올 때 반짝 좋아졌을 뿐 100여년 동안 끊임없이 재정 위기에 시달리면서 이리저리 팔려나가는 신세를 면치 못했습니다.

1970년대 오일 쇼크로 럭셔리카 시장이 흔들리자, 1972년 투자은행인 컴퍼니 디벨롭먼트에 매각됐다가 3년 후 북미 사업가들에게 다시 팔렸습니다. 이후 여러 투자자에게 사이에서 지분이 거래되다가, 1987년 포드가 지분 75%를 인수하면서 애스턴마틴의 새 주인이 됩니다. 포드 산하에서 나온 DB7은 애스턴마틴 역사상 가장 많은 7000여 대의 판매고를 올리며 부활의 신호탄을 쏘게 됩니다.
하지만 볼보, 랜드로버 등을 잇달아 인수했던 포드는 경영난에 봉착하며 2007년 다시 애스턴 마틴을 영국 사업가와 쿠웨이트 투자그룹 컨소시엄에 팔게 됩니다. 2012년에는 이탈리아 사모펀드 컨소시엄에 매각된 후 메르세데스 벤츠가 일부 지분을 매입해 기술 제휴를 맺습니다.

이처럼 최악의 재정 상태에도 끊임없이 이 브랜드를 인수하는 투자자들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애스턴마틴의 가치가 인정받고 있다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2016년 출시한 벤츠의 고성능 브랜드 AMG 엔진과 기술을 탑재한 DB11의 성공으로 애스턴마틴은 오랜만에 적자에서 탈출하게 됩니다. 2016년 1억6300만 파운드 적자에서 2017년 8700만 파운드 흑자로 턴어라운드했습니다. 경영진은 이때를 놓칠세라 기업공개(IPO)에 나서 2018년 10월 런던증권거래소 상장에 성공합니다.

애스턴마틴의 공식 회사 명칭은 ‘애스턴마틴 라곤다 홀딩스’입니다. 라곤다는 1906년에 영국에서 설립된 또 다른 유서 깊은 스포츠카 회사였지만 1947년부터 애스턴마틴의 산하 브랜드가 됐습니다. 지금은 라곤다 브랜드의 자동차를 내놓지는 않고 있습니다.
2020년에는 캐나다의 사업가인 로런스 스트롤이 지분 20%를 인수하여 대주주가 됩니다. 그는 F1의 BWT 레이싱 포인트 팀을 인수해 애스턴 마틴 F1이란 이름으로 바꿉니다. 애스턴 마틴은 1959년과 1960년 시즌에 참가한 이후, 61년 만인 2021년 시즌에 F1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로런스 스트롤은 모터스포츠와 아들에 대한 사랑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아들인 랜스 스트롤이 F1 드라이버로 성장할 수 있도록 막대한 돈을 쏟아부었습니다. 결국 애스턴마틴 F1팀을 인수하고 드라이버로 앉혔습니다. F1 전설인 제바스티안 페텔과 페르난도 알론소를 파트너 드라이버로 잇따라 영입하며 아들의 멘토로 만들었습니다.
애스턴마틴 F1팀은 2023년과 2024년에 연속으로 팀 챔피언십 순위 5위에 오르면서 상위권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하지만 올 시즌에는 현재 7위까지 떨어지며 다시 힘겨운 레이스를 펼치고 있습니다.
애스턴마틴의 현재 차량 라인업은 그랜드 투어러(GT), 스포츠카, SUV 그리고 한정판 모델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GT는 스포츠카보다 실용성에 초점을 맞춘 럭셔리카로 ‘뱅퀴시 볼란테’가 있고, 스포츠카로 ‘밴티지 로드스터’와 ‘밴티지 볼란테’, SUV로 ‘DBX S’가 있습니다.

애스턴마틴의 특징 중 하나는 문이 약 12~15도 정도 위로 살짝 올라가며 열리는 ‘스완 윙 도어’를 채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문이 열리는 모습이 마치 백조가 날개를 우아하게 펴는 모습과 비슷해 이런 이름을 씁니다. 차체가 낮은 스포츠카의 특성상 문을 열다가 인도 경계석이나 높은 연석 등에 긁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실용적인 목적도 있습니다.
애스턴마틴의 미래 차 전략은 순수 전기차 대신 벤츠와의 협력으로 하이브리드카를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플러그인하이브리드 슈퍼카인 발할라와 발키리 LM을 한정판으로 조만간 내놓을 계획입니다.

애스턴마틴의 실적은 여전히 좋지 못합니다. 2025년 상반기 매출은 4억5400만 파운드로 전년 동기 대비 약 25% 감소했습니다. 조정 이자·세전 영업손익(EBIT)은 약 1억2200만 파운드 적자로 전년 동기 대비 더 손실이 더 확대된 모습입니다.
고무적인 것은 한정판 모델을 제외한 핵심 모델의 평균 판매 단가가 약 19만2000파운드로 전년 대비 7% 증가해 프리미엄 전략이 어느 정도 주효했다는 것으로 평가됩니다. 애스턴마틴 측은 발할라와 발키리의 출시로 실적 회복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007 영화 판권을 사들인 아마존 MGM 스튜디오에 따르면 2028년경에 새로운 007 영화와 제임스 본드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또다시 애스턴마틴이 본드카로 등장할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은 듯합니다. 다니엘 크레이그가 애스턴마틴을 타고 질주하던 시절처럼 또다시 반등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최종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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