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네가 태어난 날을 저주한다.”
악취가 진동하는 빈민가의 허름하고 비좁은 집. 술에 잔뜩 취해 돌아온 아버지는, 어린 아들을 때린 뒤 잔인한 말을 내뱉었습니다. 한 사람의 존재를 뿌리째 부정하는 그 한마디는 소년의 마음속에 깊이 박혔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어도 그 기억은 결코 잊히지 않았습니다. 마치 풀리지 않는 저주처럼.
하지만 소년이 훗날 만들어낸 건, 자신이 안고 살았던 저주와는 정반대였습니다. 화가가 된 그는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밝고 상쾌한 집, 커다란 자작나무 그늘 아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식사, 가정의 행복과 조화를 그렸습니다. 이 그림들은 세계인의 마음에 ‘스웨덴의 행복’이라는 이미지를 각인시켰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가구 브랜드 이케아, ‘북유럽 감성’이라고 불리는 인테리어가 바로 그의 그림을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지독한 저주를 듣고 자란 그 아이는 어떻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낙원을 그려낸 화가가 됐을까요. 그는 어떻게 세계인의 집안 풍경을 바꿔놨을까요. 스웨덴 국민 화가 칼 라르손(1853~1919)의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가난보다도 라르손을 더욱 괴롭게 한 건 아버지의 학대였습니다. 라르손은 원치 않는 임신의 결과로 태어난 아이였습니다. 아버지에게 라르손은 먹여 살려야 할 ‘짐’이었고, 좌절과 분노를 쏟아내는 화풀이 대상에 불과했습니다. 막일을 마치고 집에 올 때마다 그는 아내와 라르손에게 주먹을 휘둘렀습니다. 어느날 아버지가 내뱉은 “나는 네가 태어난 날을 저주한다”는 말은, 라르손의 마음속에 박혀 평생 그를 괴롭혔습니다.
시궁창 같은 삶에서 유일한 희망은 그림이었습니다. 라르손이 열세 살 때, 빈민 학교의 선생님이 그의 재능을 알아봤습니다. 그림에 재능이 있는 아이들이 들어가는 스웨덴 왕립 예술 아카데미의 예비학교에 지원해 보라고 권유한 거였지요. 라르손은 보란 듯이 입학시험에 합격했습니다.
라르손의 학교생활은 즐거웠습니다. 처음에는 돈 많은 다른 학생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지만, 타고난 재능 덕분에 그는 소위 말하는 ‘인싸’, 즉 또래 학생들의 중심이 될 수 있었습니다. 돈도 벌 수 있었습니다. 그의 실력을 눈여겨본 선생님들이 신문과 잡지, 책의 삽화 그리는 일을 소개해준 겁니다. 덕분에 그는 성인이 채 되기도 전에 부모님보다 더 돈을 많이 벌어 가족을 먹여 살리게 됐습니다.


삽화가로 일한 경험은 라르손의 독창적인 화풍을 만들어내는 중요한 재료가 됐습니다. 당시 주류 미술계가 인정하는 미술은 신화나 역사를 장엄하고 엄숙한 분위기로 다루는 그림. 반면 라르손이 몸담은 삽화의 세계는 경쾌함과 전달력, 대중과의 소통이 중요한 장르였습니다. 삽화를 그리며 라르손은 인물의 성격을 몸짓 하나로 표현하고, 그림 하나로 내용을 명확하게 전달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어린 나이부터 스스로 돈을 벌어야 했던 집안 사정은 아이러니하게도 ‘금수저 정통 화가’들이 갖지 못한 매력을 그림에 심어 줬습니다.

머지않아 두 사람에게는 또 다른 아이가 찾아왔습니다. 기다리던 출산일. 아기는 무사히 태어났습니다. 예쁜 딸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습니다. 라르손의 연인이, 아이를 낳다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스물네 살의 라르손에게는 이제 갓 태어난 딸만 남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라르손은 아기를 자신의 어머니에게 맡기고 프랑스 파리로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미술의 중심지인 파리에서 꼭 성공하고 말 거야. 그곳에서 내 실력을 증명하면 명성도 높아질 거고, 돌아와서 딸을 호강시킬 수 있겠지.’ 그는 생각했습니다.
야심 찬 목표를 갖고 도착한 파리. 라르손은 스웨덴 미술 학교에서 배운 정통 유화로 승부를 겁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파리 사람들의 입장에서 스웨덴은 어디까지나 유럽의 변방에 불과했고, 스웨덴 화가들의 미술이란 것도 한참 전에 유행이 지나간 고리타분한 그림일 뿐이었습니다. 끊임없이 그림을 그려 발표했지만 프랑스 미술계는 라르손의 그림을 철저히 외면했습니다. 그 탓에 라르손은 극심한 좌절감과 외로움,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어린 시절 그를 짓눌렀던 가난은 다시 라르손의 목을 죄어왔습니다. 갖고 간 돈은 떨어진 지 오래. 끼니조차 제대로 잇지 못하고 그림만 그리다 영양실조로 죽을 뻔한 적도 몇 번이나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스웨덴에 있는 어머니에게서 편지가 도착합니다. 내용은 이랬습니다. “네 딸이 병에 걸려서 위독해. 고열에 시달리고 있어. 의사가 말하기를, 병이 나아도 후유증 때문에 아이가 평생 장애를 갖고 살아갈 거라고 하는구나. 이걸 어떡하니….”
편지를 읽은 라르손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습니다. 곧이어 정신을 차린 그는, 신에게 간절한 기도를 올리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 내용은 ‘딸의 병을 낫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이시여, 부디 자비의 손길을 베풀어 내 딸이 죽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자신조차 돌볼 힘이 없었던 라르손은, 장애를 갖고 살아남은 딸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던 겁니다. 그리고 얼마 후 어머니에게 또 한 통의 편지가 도착합니다. 딸이 죽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사정이 어찌 됐든 라르손은 자신의 아이가 죽게 해달라는 기도를 한 아버지였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좌절과 가난에 시달리던 라르손은 이 일을 계기로 자살을 생각합니다. 그렇게 그는 어느날 밤, 센 강변의 부두 끄트머리에 섰습니다. 훗날 라르손은 회고했습니다. “나는 꽤 단호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중략) 나는 아래의 깊은 물을 내려다보았다. 검은 강물은 인간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그저 조용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그의 귓가에 한 길거리 음악가가 부르는 노랫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습니다. “물에 빠져 죽을까 생각했지만, 아니, 그건 너무 차가워...” 라르손과 전혀 관계없는 가사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노래가 다르게 들렸습니다. 문득 라르손의 머릿속에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그래, 엄마를 생각해서라도 일단은 살아 보자.’ 부두에서 내려온 라르손은 주머니를 뒤져봤습니다. 동전 두 닢이 나왔습니다. 그 돈으로 라르손은 팬케이크를 하나 사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로 했습니다.

라르손이 만난 또 하나의 구원은 스웨덴 출신의 예술가 카린 베리괴(1859~1928)였습니다. 밝고 긍정적인 성격, 뛰어난 예술 재능과 현대적인 감각을 겸비한 그녀는 막 파리로 유학을 온 참이었습니다. “그녀가 내 삶으로 들어왔을 때, 마치 어두운 방에 누군가 창문을 활짝 열어젖힌 것 같았다. 그녀는 빛 그 자체였다.” 얼마 안 돼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고, 곧 결혼식을 올립니다. 이후 그의 그림은 전보다 훨씬 더 좋아졌습니다. 1883년 서른 살의 나이로 마침내 프랑스에서 받은 상(살롱 메달)이 이를 증명합니다. 파리 유학 6년, 끝없는 절망 끝에 거둔 귀중한 성공이었습니다.



원래 라르손의 목표는 파리에서 인정받는 것. 목표를 달성한 그는 아내가 된 카린과 함께 스웨덴에 돌아갔습니다. 마침 카린의 아버지가 시골 마을의 작은 목조 주택을 하나 마련해준 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소박한 집에서 전설은 시작됩니다.
카린은 평범한 예술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인테리어 디자이너’라는 말이 등장하기도 전에 혁신적인 실내 디자인을 창조해낸, 시대를 앞서가는 감각의 소유자였습니다. 당시 유럽의 실내 디자인을 지배하고 있던 건 ‘빅토리안 스타일’. 격식 있고 화려하지만 어둡고 무거운데다 잡다한 장식이 많은, 집주인의 위엄을 과시하는 스타일이었습니다. 카린이 만들어낸 디자인은 반대였습니다. 밝고, 편안하고, 가족 구성원 모두가 행복하게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따뜻한 보금자리를 그녀는 꿈꿨습니다.




이를 위해 카린은 스웨덴의 민속 디자인과 영국의 미술공예운동 등 다양한 스타일을 결합해 새로운 인테리어 스타일을 만들었습니다. 직접 가구를 디자인하고 대담한 색의 직물을 만들어 이를 장식했지요. 라르손은 그 안에서 펼쳐지는 가족의 일상을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부부는 행복했습니다. 그림에 등장하는 자녀 수는 점점 늘어나 일곱 명이 됐습니다. 밥을 먹는 시간, 공부하는 시간, 떠들썩한 생일 파티, 고요한 휴식의 순간…. 가족의 모든 순간은 라르손의 작품이 되었습니다. 1899년 출간된 <집(Ett hem)>은 이 그림들을 모은 책이었습니다.





책은 출간되자마자 스웨덴과 독일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햇살 가득하고 자연과 함께하는, 가족 중심적인 삶의 모습은 산업화와 도시화에 지친 유럽인들에게 너무나도 아름다워 보였거든요. 그렇게 라르손 부부의 집은 스웨덴의 행복한 집, 나아가 세계인에게 ‘행복한 가정’ 그 자체를 상징하는 이미지가 됐습니다. 훗날 가구 회사인 이케아, 우리나라 사람들도 좋아하는 ‘북유럽 스타일’의 인테리어도 이들의 집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렇게 라르손은 어린 시절 그토록 갈망했던 행복한 집을 스스로 만들어냈습니다. 빛과 사랑이 가득한 세상, 행복한 아이들이 풍성한 식탁에 둘러앉아 있는 모든 그림은 아들의 존재를 저주했던 아버지에 대한 평생의 대답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라르손의 아버지는 어떻게 됐을까요. 경제적인 성공을 거머쥔 라르손은 부모님에게 집을 사드렸습니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평온한 말년을 보냈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가슴에 품었던 그 저주와 증오의 감정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습니다. 부정적인 감정들은 불쑥불쑥 나타나 라르손을 괴롭히곤 했지요. 하지만 아버지가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아버지를 용서했습니다. 고통을 끌어안고 극복했기에 자신을 위해 내릴 수 있었던, 성숙한 결단이었습니다.
여기서 이야기가 끝난다면 완벽한 해피엔딩일 것입니다. 하지만 라르손의 삶이 그렇게 행복으로만 마무리되지는 않았습니다.
절친한 친구였던 안데르스 소른(Anders Zorn, 1860~1920)의 존재는 라르손의 야망을 끊임없이 자극했습니다. 소른은 스웨덴의 또다른 국민 화가 중 한 사람.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영역에서 성공을 거둔 라르손과 달리, 주류 미술계에서 최고의 화가 중 하나로 꼽혔던 ‘화가들의 화가’였습니다. 미국 대통령 세 명의 초상을 그릴 정도로 그의 명성은 국제적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며 라르손은 생각했습니다.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

어느 영역이든, 대중적인 명성을 얻어 성공한 사람들은 ‘자기 영역의 전문가’에게도 인정받고 싶다는 갈망을 갖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더군다나 당시 미술계에서는 라르손의 주특기인 상업미술이 순수미술보다 격이 훨씬 떨어진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일발 역전을 노리던 라르손은 승부수를 띄웠습니다. 스톡홀름의 스웨덴 국립 박물관 중앙 계단에 있는 마지막 빈 벽. 그 벽에 벽화를 그려 넣는 것이었습니다. 박물관 측에 그가 제안한 그림 ‘한겨울의 희생제(Midvinterblot)’는 그의 야망이 잘 드러난 작품이었습니다. 크기가 가로 14미터, 세로 6미터에 달하는 이 그림은 북유럽 신화의 한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흉년을 끝내기 위해 스웨덴 왕을 산 제물로 바치는 어두운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박물관 벽에 장식되지 못했습니다. 해석이 잘못됐다느니, 고증이 틀렸다느니, 지나치게 분위기가 어둡다느니 하는 의견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비판 밑에는 당시 스웨덴 미술계의 편견이 깔려 있었습니다. 라르손은 상업적으로 성공한 화가일 뿐, 순수예술에 종사하는 ‘진정한 예술가’는 아니라는 뒤틀린 인식이었지요. 라르손은 좌절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8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1997년, 문제의 그림 ‘한겨울의 희생제’는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스웨덴 국립 박물관 벽에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주변과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그 그림은 라르손의 생각이 옳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너무 늦게 받은 인정이었습니다.


라르손은 지옥 같은 삶에서 출발해 천국과도 같은 가정을 이뤄냈습니다. 생전 그는 온 세상의 사랑을 받은 예술가였고, 그가 남긴 수채화 속 행복한 가정의 이미지는 세계인의 라이프스타일을 바꿔놓았습니다. 위대한 성취입니다. 그런 라르손이 별로 명확하지도 않은 상업미술과 순수미술의 구분 때문에 말년에 이토록 좌절감을 느꼈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고, 불합리해 보입니다.
하지만 삶의 마지막에서 라르손은 뭔가를 깨달은 것 같습니다. 그는 1919년 초 가벼운 뇌졸중을 앓은 뒤 죽음을 예감하고 자서전 집필 마무리에 매달립니다. 이때 그가 쓴 자서전의 마지막 부분은 그 전의 날카로운 말투와 확연히 다른 분위기입니다. 그는 신에게 감사하고, 자신에게 사랑을 준 이 세상에 감사합니다. 세상을 떠나기 이틀 전, 라르손은 자서전 집필을 마무리했습니다. 그가 쓴 자서전 마지막 줄은 이렇습니다. “그러나 나는 두렵지 않다. 나는 사랑했으므로.”



**이번 칼럼은 Carl Larsson: The Autobiography of Sweden's Most Beloved Artist(자서전 영문 번역판), Carl and Karin Larsson: Creators of the Swedish Style(Karin Larsson, Michael Snodin, Carl Larsson, Elisabet 지음)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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