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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프랑스 포도밭서 만나다…와인과 예술의 마리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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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상프로방스 와이너리
예술로 물든 샤토 라 코스트

英부동산 재벌 매입 후
61만평 포도밭 곳곳에
46점 예술작품 심어놔

안도 다다오·프륀 누리
예술계 슈퍼스타 작품들
직접 만지고 체험하며 감상

3~4개월마다 새 전시
한국 단색화의 거장
하종현 화백 개인전 열려


“포도나무가 몇 그루 있나요?”

“음… 솔직히 말하면 저는 와인이나 포도는 잘 몰라요. 자, 이제 다음 데이미언 허스트 작품을 볼까요?”

포도밭에서 여행자 투어를 막 시작하던 참이었다. 일행의 가이드를 맡은 마리는 “나는 와인 전문가가 아니다”고 당당하게 답했다. 여기는 와이너리인데, 와인을 모르는 가이드라니? 이 짧은 대화는 ‘샤토 라 코스트’라는 공간의 정체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일화로 남았다.

엑상프로방스의 와이너리 샤토 라 코스트의 주인공은 포도나무도, 와인도 아니라 예술이다. 200만㎡(약 61만 평) 면적에 46점의 작품이 흩뿌려져 있다. 작가들의 면면은 화려하다. 루이스 부르주아, 아이웨이웨이, 리처드 로저스, 장미셸 오토니엘, 프랭크 게리, 션 스컬리, 리처드 로저스…. 전 세계 미술계의 슈퍼스타 아티스트들이 총집합해 있다.

형식도 규모도 제각각인 작품들 사이에서 중심을 잡는 것은 일본 건축가 안도 다다오다. 그는 시그니처인 노출 콘크리트 기법으로 와이너리의 정문과 인포메이션 센터를 지었다. 와이너리를 찾는 이들이 가장 먼저 들르는 곳이다. 와이너리 가이드 투어를 원한다면 이곳에서 가이드를 만나게 된다. 와인이 아니라 예술을 전공한 도슨트가 곳곳의 작품 해설을 진행한다. 와이너리 지도를 나눠주던 마리는 “모든 작품을 다 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니 욕심내지 말라”고 했다.

포도밭을 예술의 성지로 만든 이는 영국 아일랜드 출신의 부동산 재벌 패디 매킬런이다. 이전부터 남다른 취향과 예술적 조예를 가진 컬렉터였던 그는 예술가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는 2002년 와이너리를 매입하고, 자신의 ‘친구들’에게 와이너리를 위한 작품을 만들어줄 것을 의뢰했다. 기성 작품이 포도나무 사이에 덩그러니 놓이는 것이 아니라, 형태와 의미가 모두 주변 환경과 어우러지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아티스트들은 오직 라 코스트만을 위한 헌정 작품을 제작했다. 대부분 작품이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유일한 에디션인 이유다.


와이너리에서는 영구 설치 작품 외에도 3~4개월마다 새로운 전시가 열린다. 작가 선정에는 매킬런이 직접 참여한다.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 수상 건축가들이 지은 네 개의 파빌리온이 갤러리가 된다. 지난 6월부터 하종현의 개인전 ‘라이트 인투 컬러’가 열리고 있다. 퐁피두센터를 설계한 이탈리아 건축가 렌조 피아노의 파빌리온에서다. 파빌리온은 반지하지만 천장과 전면 창을 통해 자연광이 가득 들어온다.

파빌리온의 도슨트는 “하종현는 한국의 ‘단색화’를 대표하는 거장이고, ‘삼베’를 캔버스 삼아 작업하는 것이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삼베라는 단어를 한국어로 또박또박 발음한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이어 일행을 향해 “당신이 이 전시를 방문한 두 번째 한국인”이라고 했다. 첫 번째는? BTS의 RM. 예술 애호가로 소문난 그는 전시를 축하하기 위해 개막식 날 이곳을 찾았다고.


아트 마니아들이 흥분할 만한 지점은 또 있다. 바로 작품을 손으로 만져볼 수 있다는 것. 미술관 같은 엄숙한 공간에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손끝으로 느끼면서 감상의 재미가 배가되는 작품도 있다. 허스트가 2017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공개한 ‘믿을 수 없는 난파선의 보물들’ 시리즈가 그렇다. 동아프리카 앞바다에 좌초돼 있던 고대 난파선 안의 보물과 조각상을 건져 올렸다는 콘셉트의 작품이다. 산호로 뒤덮이고 바닷물에 부식된 듯한 표면은 사실 대리석과 청동으로 정교하게 조각한 위장이다. 허스트 특유의 유머러스한 기만이 녹아 있는 시리즈다. 작품을 멀찍이 떨어져 감상해야 하는 비엔날레에서는 전시장 말미 해설을 통해서야 사실을 알게 되지만, 라 코스트에서는 손으로 질감을 느끼며 비밀을 알아차리게 된다.

감상을 넘어 체험으로 이어지는 작품도 있다. 프랑스 작가 프륀 누리의 ‘마더 어스(Mother Earth)’가 그렇다. 여성의 신체를 대지에 몸이 반쯤 파묻히도록 설치한 작품이다. 관람객은 둔부를 향해 난 통로를 통해 들어갈 수 있다. 컴컴한 작품 내부, 곧 자궁 속을 둘러보고 다시 햇볕을 향해 나가는 순간 깨닫게 된다. 이것은 곧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탄생임을. 가이드 마리는 작품 해설 끝에 “새로운 생일을 맞은 것을 축하한다”고 덧붙였다.

이탈리아의 한 와이너리는 포도나무에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려준다는데, 와인 맛을 좋게 만드는 데 효과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미술 작품 사이에서 익어가는 와인은 어떤 맛일까? 두 시간여의 투어가 끝날 때쯤 마침내 와인 숍에 다다라서야 이 궁금증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다. 와인 숍은 블록버스터급 갤러리와는 대조되는 소박한 규모다. 천장에 차양을 쳐 대충 햇볕을 가린 야외 식당에서는 샐러드나 파스타 같은 수수한 현지 요리를 내놓는다. 여기에 식당 앞 플라타너스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장미셸 오토니엘의 황금빛 구슬을 바라보며 와인을 홀짝여 본다. 와인 맛이 예술적인가? 분명한 것은 예술 작품과 와인은 꽤나 괜찮은 마리아주를 이룬다는 것이다.

엑상프로방스 = 김은아 한국경제매거진 여행팀 기자 una.ki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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