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쩔 수가 없다’는 말엔 비겁한 정서가 담겨요. 나쁜 짓인 걸 알면서도 합리화하니까요. 그런데 다들 각자의 사정이 있지 않겠어요? 해고를 당하는 사람도, 그걸 행하는 사람도 ‘어쩔 수가 없다’고 해요. 이 충돌이 빚어내는 비극을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아마 극장에서 관람하면 ‘그래, 너도 어쩔 수 없었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 수도 있을 겁니다.”
19일 서울 CGV용산아이파크몰에서 열린 ‘어쩔수가없다’ 제작발표회에서 박찬욱 감독은 영화에 대해 이같이 설명했다. 다음 달 국내 개봉하는 이 영화는 미국 소설 ‘액스(The Ax)’가 원작이다. 이 소설이 국내 출간될 당시 박 감독은 추천사에 ‘각색해서 영화로 만들고 개봉명을 모가지로 하면 어떨까 생각 중’이라고 썼다. 정리해고를 영어로 ‘도끼질한다’고 표현하는 것처럼, 우리말로는 ‘모가지 날아갔다’고 쓰기 때문. 그런데 정작 영화 제목은 ‘어쩔수가없다(No Other Choice)’가 됐다. 촬영부터 음악, 화면의 색깔까지 무엇하나 허투루 쓰는 법이 없어 ‘미장센의 대가’로 불리는 그는 왜 오래전부터 마음 먹었던 개봉명을 바꾼 걸까.
해고를 당한 좌절, 취업을 향한 분투 같은 위태로운 개인의 사정이 의외로 누구나 한 번쯤 겪을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박 감독은 “(소설과 영화는) 멀쩡한 보통 사람이 사회시스템에서 내몰리는 과정을 묘사했다”며 “웃을 수도 있고, 눈물 흘릴 수도 있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고 밝혔다. ‘어쩔수가없다’의 본질이 스릴러가 아니라 블랙코미디가 가미된 보편적인 드라마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날 공개된 일부 장면에서 주인공뿐 아니라 등장 캐릭터마다 “어쩔 수가 없다”는 대사를 반복하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깐느박 영화가 이렇게 웃겼나”
이날 제작발표회에는 박 감독과 함께 이병헌(만수), 손예진(미리), 박희순(선출), 이성민(범모), 염혜란(아라), 차승원(시조) 등 주·조연 배우 6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하나같이 “박찬욱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유머러스한 작품”이라고 입을 모았다. 과감한 폭력과 성적 묘사가 두드러진 전작들과 달리 대중들이 쉽게 웃음을 터뜨릴 만한 요소가 많다는 뜻이다. ‘공동경비구역 JSA’ 등 전작에 출연했던 이병헌은 “시나리오를 읽고선 ‘제대로 읽은 게 맞나’ 싶을 만큼 웃음 포인트가 많아 놀랐다”고 했고, 박희순은 “갈등이 고조될 수록 웃음의 강도가 커진다”고 설명했다.
박 감독의 열 두 번째 장편인 ‘어쩔수가없다’는 오래 전부터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뜻을 밝힐 만큼 애정이 깊은 작품이다. 중년 회사원 만수가 덜컥 해고된 후 어렵게 장만한 집과 가족의 안정적인 생활을 지키려 재취업을 결심하고 구직 경쟁자를 제거하는 이야기가 얼개다. 박 감독은 “사춘기 시절부터 미스터리 소설을 좋아했는데, 이 작품은 몇 번을 곱씹어도 음미할 가치가 있는 심리적 장치가 잘 갖춰져 있다”면서 “이 틈에 새로운 종류의 부조리한 유머를 넣을 만한 가능성이 보였고, 내가 만든다면 더 슬프게 웃긴 감정을 넣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설명했다.

의외의 코미디 요소가 작품에 녹아들었지만, 박찬욱의 미장센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박 감독은 영화의 배경이 되는 집과 영화음악을 두고 “그 자체로 하나의 캐릭터”라고 말할 정도로 공을 들였다고 밝혔다. 특히 조영욱 음악감독이 참여한 영화음악은 영국 런던 애비로드 스튜디오에서 작업했고, 세계적인 첼리스트인 장기엔 케라스를 섭외했다. 박 감독은 “제작비를 쥐어짤 대로 짜고 출연료까지 깎아가며 녹음비용을 마련했다”면서 “연주자 실력부터 음질까지 최상의 수준에 도달했다”고 말했다.
‘어쩔수가없다’는 오는 27일 개막하는 ‘제82회 베니스 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며 월드프리미어로 공개된다. 또 다음달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며 국내에서 첫 공개될 예정이다. 이를 두고 박 감독은 “한국영화가 오랜만에 해외 영화제에 간다는 점이 의미가 있다”면서도 “한국영화 부흥과 함께하며 30주년을 맞은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초대받은 게 특히 영광스럽다”고 말했다.
유승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