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지만 21세기 문화 생태계는 소유가 아닌 교류 속에서 힘을 얻는다. 때로는 타자의 설명, 다른 국적 연주자의 해석이 오히려 그 문화를 세계화시키기도 한다. 그러한 아이러니가 2025년 에든버러 페스티벌에서도 벌어졌다. ‘포커스 온 폴란드(Focus on Poland)’ 프로그램에 한국 바이올리니스트 김봄소리가 참여해 폴란드 음악을 알리는 문화 사절로 나선 것이다. 이 리사이틀은 그녀의 에든버러 페스티벌 데뷔 무대이기도 했다. 2016년 비에니아프스키 콩쿠르에서 라파우 블레하츠의 지지를 받은 인연이, 이제는 폴란드 음악계가 그녀의 명성을 필요로 하는 형국으로 이어졌다. 올해 김봄소리가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발매한 바체비치의 ‘폴란드 카프리스’는 해당 작곡가의 작품이 메이저 음반사에서 소개된 최초의 사례라 할 수 있다.

지난 14일 에든버러 퀸즈 홀에서 김봄소리는 바체비치뿐 아니라 시마노프스키, 파데레프스키, 비에니아프스키까지 폭넓은 레퍼토리를 선보였다. 포레의 소나타에서는 긴장감이 감지되었으나, 이어진 ‘녹턴과 타란텔라(Op.28)’에서 섬세하면서도 박진감 넘치는 표현력이 빛을 발했다. 분위기와 색채, 템포 모든 면에서 극단적인 대조를 품은 이 곡에서 김봄소리는 섬세한 표현력을 과시했다. 특히 타란텔라에서는 고도의 테크닉이 특유의 통통 튀는 프레이징과 결합하여 박진감 넘치는 분위기를 연출했다.
2부 첫 곡 ‘폴란드 카프리스’는 독특한 리듬이 변형된 민요 선율과 결합된 현대적 스타일의 작품이었다. 음반으로도 녹음한 이 곡에서 김봄소리는 현대적 어법에 숨어 있는 폴란드 정서와 뉘앙스를 놀랍도록 자연스럽게 뽑아냈다. 이는 이어서 연주한 파데레프스키 소나타 A단조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녀의 예술이 단순한 악보 연구와 연습만이 아닌, 경험을 통해 발전하고 있음을 의미했다.

마지막 곡 ‘파우스트 주제에 의한 화려한 환상곡’은 이날 공연의 하이라이트였다. 자신의 시그니처(특징)나 다름없는 이 곡에서 김봄소리의 기교는 최대치로 폭발했다. 거구의 피아니스트 토마스 호페의 반주 또한 바이올린을 몸집만큼 든든하게 지원하는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바이올린의 즉흥적인 제스처에도 흔들림 없이 여유로이 대처하는가 하면 때때로 느린 패시지에서는 바이올린보다 강한 존재감을 과시하며 악기 간에 대등하면서도 돈독한 호흡을 보여줬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청중 반응이다. 이 무대의 객석은 한국 팬들보다 현지 유럽 관객으로 가득했다. 낯선 레퍼토리에도 집중하며 환호하는 그들의 모습은, 김봄소리가 한국보다 해외에서 더 큰 사랑을 받는 아티스트임을 보여주었다.

에든버러=노승림/음악 칼럼니스트, 숙명여대 정책대학원 문화행정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