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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오르겠지?" 대박 노렸는데…'16만원→3만원' 대폭락 [이광식의 한입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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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일소 피해' 와중에도
저장 배로 큰돈 번 농가 나와
지난해 농가들 너도나도 물량 아껴
설 지나고 가격 내림세…"뱃값 책임져라" 투서도


배 가격이 바닥을 뚫을 기세다. 11일 한국농촌경제연구원(KREI)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달 2024년산 배(상품)의 15㎏당 도매가격은 3만1597원으로, 작년 같은 달(16만9763원)보다 무려 80% 넘게 떨어졌다. 소매가격도 반값 밑으로 떨어졌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농산물 유통정보(KAMIS)에 따르면 지난 8일 배(신고) 10개당 소매가격은 3만6026원으로, 작년(7만6077원)보다 52.6% 하락했다.
작년 배 생산량, 4년만에 가장 적었는데...
물량이 넘쳐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아직 햇배가 본격적으로 출하되기 전인 현재 시장에서 거래되는 배는 2024년산인데, 지난해엔 배 생산량이 눈에 띄게 적었다. 통계청이 작년 12월 발표한 바에 따르면 지난해 배 생산량은 17만8000t으로, 2020년(13만3000t) 이후 4년 만에 가장 적었다.

올해 뱃값이 어디부터 꼬였는지 이해하려면 시계를 2023년으로 돌려야 한다. 재작년 배 생산량은 18만4000t으로, 전년(25만1093t) 대비 26.8% 줄었다. 재배면적(성과수)은 1년 전보다 2.4% 줄었을 뿐 큰 차이는 없었는데, 단수가 25%나 감소한 게 문제였다. 봄철 냉해에 더해 ‘일소 피해(강한 햇빛으로 과실이 타들어 가고 썩는 현상)’가 심각했다는 설명이다. 소비자들은 작년을 ‘역대급’ 무더위로 기억하지만, 배 농가의 피해는 재작년에 더 컸다.

문제는 흉작으로 농가들이 울상을 짓던 당시에도 떼돈을 번 농가가 속속 나왔다는 점이다. 이들이 큰돈을 번 방법은 간단했다. 수확한 배를 내다 팔지 않고 저장했다 햇배가 나오기 직전까지 가격이 오를 때 점차 팔았다. 배 생산자단체 관계자는 “15㎏에 5만원정도 하던 배를 15만~20만원에 파는 곳도 있었다”며 “평년보다 3~4배 많은 돈을 벌었다”고 했다. 실제 작년 7월 평균 배 10개당 소매가는 7만9559원으로, 거의 8만원에 육박하면서 1년 전 같은 달(2만8531원)보다 세배 가까이 높았다.



한번 ‘대목’을 놓쳤던 배 농가들은 이 전략을 잊지 않았다. 지난해에 똑같은 방법으로 움직였다. 수확한 배를 시중에 풀지 않고 냉장고에 차곡차곡 쌓아나갔다. 정부와 배 자조금 단체가 “제발 시중에 물량을 풀어달라”고 요청해도 요지부동이었다. 조금만 버티면 큰돈을 벌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이 더 커서다. 설 연휴가 있었던 올초에도 배 가격이 높게 유지되자 농가들의 기대감은 더 커졌다. 지난 1월 배 10개당 소매가격은 4만4131원으로, 전년(3만3115원)보다 33.3% 높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대박’은 없었다. 올 상반기 배 소매가격은 평년 수준을 웃돌았지만, 농가 소득과 직결되는 도매가는 2월부터 전년보다 낮아졌다. 5월엔 배 15㎏당 도매가가 5만754원을 기록하면서 평년(5만6840원) 수준을 밑돌기 시작했다.

가격이 계속 떨어지자 사정이 바뀌었다. 농가들의 ‘재고 처리’ 부담이 현실화했다. 농가들은 저장해둔 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판매처가 마땅치 않았다. 설 대목은 이미 지났고, 올 추석은 햇배 출하 이후인 10월에야 있어서다. 결국 가격은 더 빠르게 떨어졌다. 지난달 배 15㎏당 도매가(3만1597원)는 평년(6만1520원)과 비교해도 절반 수준이다.
가뜩이나 수요층 얇은데…가격 폭등에 소비자들 '외면'
왜 올해엔 대박이 터지지 않은 걸까. 우선 배는 수요층이 두껍지 않다. 예를 들어 사과의 경우 소비자들이 아침 식사 대용으로도 찾고, 카페에선 주스로도 쓰이는 등 활용도가 많다. 하지만 배는 다르다. 설이나 추석 명절 때 제사용품으로 쓰는 경우가 아니고선 배를 먹을 일이 많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농림 축산식품 주요 통계 2024’에 따르면 2023년 1인당 배 소비량은 3.1㎏으로, 사과(7.7㎏)의 절반보다 적고 복숭아(3.6㎏)나 포도(4.4㎏)보다도 적다.

지난해부터 뱃값이 가격이 지나치게 폭등하면서 소비자들이 더 외면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배는 설과 추석 때 제사용품 용도로 소비가 많은데, 지난 설 때 판매가 저조해지자 소매점을 중심으로 환불 요청도 빈번하게 발생한 것으로 전해졌다. 소매점에서 산지에 발주를 낸 물량을 다 소화할 수 없게 되자 “차라리 납품하지 말아달라”는 요청을 넣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지난해 폭염의 영향으로 배의 품질도 전반적으로 좋지 않다는 평가다. 작년 9월 KREI 농업관측센터가 표본 농가를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배 생육상황이 평년 대비 좋다는 응답은 21.2%에 불과했고, 나쁘다는 답변은 27.7%를 차지했다.

큰돈을 기대하며 지난해 수확한 물량을 쥐고 있던 농가들은 배 가격이 폭락하자 패닉에 빠졌다. 아예 정부를 상대로 민원을 넣는 곳도 나타났다. 충남의 한 농가는 농식품부에 “뱃값을 책임지라”는 취지로 투서도 넣은 것으로 알려졌다.

설상가상 올해 생산되는 뱃값도 낮게 형성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김상동 한국 배 자조금 관리위원회 사무국장은 “저장 배가 많이 팔리면 올해 배 가격이 오르고, 작년 배가 많이 쌓이면 금년도 배 가격이 내려간다”며 “올해는 창고에 ‘숨겨진’ 물량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금년도 배 가격이 오르기 쉽지 않아 보인다”고 했다.

이광식 기자 bumer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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