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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어 "韓에 대한 전략은 '셰이크다운'"…지불능력 한계 시험하는 美 [이상은의 워싱턴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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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일본에 대한 협상전략은 셰이크 다운(마구 흔들어서 터는 것)이다.’

최근 워싱턴DC 정가의 한 관계자가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가 비공개 모임에서 했던 발언을 기자에게 전한 내용이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정부가 한국 등을 대하는 태도는 주고 받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이들은 한국과 일본 등이 미국을 ‘벗겨 먹었다’는 인식에 근거해 그 대가를 받아내야 한다는 생각에 빠져 있다. 한국을 ‘머니 머신(돈 기계)’라고 표현해 온 트럼프 대통령은 돈통을 거꾸로 들고 흔들어서 최대치를 뽑아 낼 기세다.
○ 지불능력 한계 시험하는 美
오는 8월1일 트럼프 대통령이 통지한 상호관세(25%)가 발효될 예정인 가운데 한국의 협상 전략이 총체적인 난국에 빠졌다. 주요국과의 관세협상에서 미국이 진전을 보지 못하던 지난 주까지만 해도 8월1일 시한에 매이지 않고 여유를 갖고 협상하자는 의견이 다수였다. 하지만 일본과의 협상이 갑작스럽게 급물살을 타면서 타결이 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유럽연합(EU)도 상호관세를 15%로 수용하는 선에서 관세협상이 타결될 가능성이 크다.

구윤철 경제부총리와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장관, 위성락 국가안보실장과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 간 회담이 막판에 취소되고 빈손으로 돌아온 것은 상징적이다. 실제로 사정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급한 것은 한국’이라는 메시지를 확실하게 보냈다.

이런 가운데 트럼프 대통령은 “돈을 내고 관세를 낮추라(buy it down)”면서 일본 수준의 가격표를 한국에 들이밀 기세다. 미국 소비시장에 대한 접근권을 돈 주고 사라는 뜻이다. 미국은 그 대가로 대규모의 투자와 쌀·소고기·디지털교역 등의 부문에서 시장개방을 원하고 있다.

특히 일본과의 협상에서 5500억달러 규모 투자기금 조성이 포함된 것은 미국 제조업 부흥 비용을 그동안 무역흑자국에 전가하겠다는 의도다. 이를 통해 무역적자를 줄이면서도 자국 산업을 진흥시키겠다는 구상이다. 아울러 이러한 기금에 투자한 각국의 이해관계를 미국의 이익에 맞춰 조정하는 역할도 노리고 있다.

투자기금 운영이라는 방식에는 불확실성이 적지 않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 관점에서는 장기적으로 기금 운영이 설령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당장 미국 내 지지층을 결집하고 내년 중간선거에서 승리를 가져올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남는 장사다.

미국이 제시하는 가격표는 고무줄이다. 미국이 내주는 것에 비례해서 결정되는 게 아니라 각국의 지불 능력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일본과의 협상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자의적으로 설정한 상호관세율이라는 가상의 수치를 내세워서 1%포인트를 떨어뜨릴 때마다 추가 대가를 요구한 것은 상대가 더 내놓을 게 없을 때까지 압박하기 위한 영리한 전술이다.

EU의 한 외교관은 파이낸셜타임스(FT)에 “일본과의 합의는 ‘셰이크다운’의 조건을 명확하게 했다”면서 “대부분의 회원국은 마땅치 않아 하면서도 이 거래를 수용하게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 “죄수의 딜레마에 빠졌다”
트럼프 정부 출범 초기 관세전쟁이 시작될 때까지만 해도 전 세계에선 보복관세 가능성을 우려했다. 하지만 현재 중국과 EU, 캐나다 정도를 제외하면 보복관세를 언급하는 나라는 사실상 없다.

경제규모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보복관세의 여파가 자국에 미치는 영향이 훨씬 큰 나라가 많기 때문이다. 한국이 대표적이다. 협상에 참여한 한 관계자는 미국이 “경쟁국에 비해 불리한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는 각국의 사정을 활용하고 있다”면서 “죄수의 딜레마에 빠진 형국”이라고 토로했다. 각국이 경쟁국과 공동 대응을 하지 못하는 가운데 미국만이 전체 판을 보면서 불리한 협상을 강요하고 있다는 얘기다.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은 이날 CNBC에 출연해 “한국이 일본의 합의를 읽을 때 한국의 입에서 욕설이 나오는 것을 들을 수 있었을 것”이라며 “한국은 일본의 협상 타결을 봤을 때 ‘아, 어쩌지’ 그랬을 것”이라고 했다. 일본과의 협상 타결을 이용해 한국에 더 많은 것을 요구하겠다는 뜻을 감추지 않은 것이다.

관세는 경제문제라는 인식이 깨진 만큼, 한국에 대한 그 어떤 불만도 관세 부과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상황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친구인 자이르 보우소나루 전 브라질 대통령 석방을 주장하며 브라질에 50% 관세를 부과했다. 내정간섭이라는 비판은 개의치 않았다. 베선트 장관은 러시아 제재 위반에 대한 2차 관세를 언급하면서 “정치적 목적을 위해 관세를 수단으로 사용하는 데 상원이 동의한 것은 혁명적인 변화”라고 표현했다.

워싱턴DC의 한 통상 전문가는 “미국은 언제나 한국이 자기 편에 서야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면서 “중국과 거리를 두는 것을 망설이는 모습이 현재 관세 협상이 제대로 되지 않는 문제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보는 것은 안이한 생각”이라고 비판했다.

새 정부가 출범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양국 간 소통 공백이 생긴 것도 치명적이다. 다른 통상 전문가는 “일본은 그동안 주미대사를 중심으로 러트닉 장관 등에 굉장히 공을 들인 덕분에 다소 갑작스럽게나마 협상타결이라는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면서 한국은 이런 노력을 기울이지 못한 점을 아쉬워했다.

워싱턴=이상은 특파원 se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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