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술이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임계점에 점점 다가서는 가운데, AI가 몰고 올 충격과 변화에 대한 기대와 공포가 교차하고 있다. 이러한 격변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류에게 단순한 예측을 넘어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근본적인 사유를 요구하는 책 <새로운 질서>가 국내에 번역 출간됐다.
이 책의 공동 저자는 냉전의 외교 전략을 설계한 거물 정치가 헨리 키신저, 구글의 전 최고경영자(CEO)이자 기술 정책 전문가인 에릭 슈밋, 마이크로소프트 전 연구 책임자이자 생명과학 연구자 크레이그 먼디다. 특히 키신저가 생전 마지막으로 쓴 책이라는 점에서 책의 무게감을 더하고 있다. 키신저는 100세의 나이에도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주석과 AI의 위력과 위험성에 대해 논의할 만큼, 이 문제를 인류의 미래를 결정할 중대한 과제로 여겼다. 정치, 기술, 과학의 영역에서 평생을 보낸 저자들이 AI 시대를 입체적이고 통합적인 시각에서 조망하고 있다.
'챗GPT'가 세상을 놀라게 하기 훨씬 전인 2018년, 키신저가 에세이 '계몽주의는 어떻게 끝나는가'를 통해 AI의 위험성을 경고하자 많은 사람이 놀랐다. 당시만 해도 AI는 화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2022년 말 오픈AI가 챗GPT를 시장에 선보이고 나서야 AI는 초미의 관심사가 됐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들은 일찍이 AI가 단순한 기술 혁신을 넘어, 사회 구조, 정치 질서, 인간의 존엄성 자체를 바꿀 수 있음을 감지했다. 실제로 책에서 제시하는 시나리오들은 무척 현실적이면서도 충격적이다. 예컨대 AI 패권을 선점한 일부 국가만이 혜택을 누리고, 나머지 국가는 데이터를 제공하는 ‘조공국’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 또 통제되지 않은 오픈소스 AI가 범죄 집단의 무기로 전락해 사회적 혼란을 부를 수 있다는 경고가 대표적이다. 나아가 인간의 자유의지가 AI에 의해 대체되거나, 인간이 수동적 소비자로 전락해 점점 무력해질 수 있다는 진단은 섬뜩할 정도로 현실적이다.
하지만 이 책은 단순히 공포를 조장하거나 기술 비관론에 치우치지 않았다. 그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철학적 사유와 전략적 제안을 동시에 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주목할 점은 ‘노동’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다. 많은 사람들이 AI로 인한 일자리 상실을 걱정하지만, 저자들은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만약 AI가 모든 고역을 대신하게 된다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충만함을 느끼고, 자기 실현을 이룰 수 있을까? 다시 말해, 노동이 단지 생계 수단이 아니라 인간성의 한 표현이었다면, 그 자리를 무엇으로 대체할 수 있을까? 단지 일자리의 유무가 아니라, ‘존재 방식’의 근본적인 변화가 시작된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책은 또 AI 시대의 전쟁 양상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AI가 인간을 대리해 전쟁을 수행하고, 디지털 인프라를 공격하는 방식으로 갈등이 벌어질 경우, 기존의 군사 윤리나 병사의 용맹함은 의미를 잃는다. 전쟁이 인간 없는 기계의 게임이 되었을 때 평화를 유지할 힘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평화의 조건과 전쟁의 윤리는 완전히 새로운 프레임 속에서 다시 정의돼야 할 것이다. 저자들은 이러한 질문들을 제기하면서도, 하나의 정답을 제시하기보다 독자들에게 깊은 사유를 촉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과학서이자 철학서이며, 현실정치를 다루는 전략서로도 읽을 수 있다. AI 기술의 발전상을 소개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을 다시 꺼내들고 있다. 정보 처리 속도가 인간 뇌보다 수백만 배 빠른 AI 앞에서 우리는 어떤 고유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기술이 더 이상 도구가 아닌 '행위자'로 떠오른 시대, 인간은 여전히 주체로 남을 수 있을까?
이 책은 기술에 무지한 이들에게 경각심을 주고, 기술에 도취된 이들에게 균형을 요구한다. 공포와 낙관의 경계를 넘나들며 던지는 마지막 질문은 묵직하다. '당신은 앞으로의 세상에서 여전히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설지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