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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아름다움을 걷어낸 이곳…콘크리트 유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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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人間을 위한 건축실험, 브루탈리즘을 말하다

‘마감 없이 그대로 드러난 노출 콘크리트’ ‘채색이나 장식이 없는 외관’ ‘육중한 건물’….

브루탈리즘(brutalism)은 잿빛 하늘처럼 차갑고 어둡게 기억된다. 브루탈리즘 건축물은 르네상스 시대의 아름다운 건물과 극단에 서 있다. 재료와 건물의 기능을 그대로 살린 외관과 구조는 기괴해 보이고, 거기에 거대하고 웅장한 탓에 위압감까지 준다. 브루탈리즘이 ‘잔인한 건축’이라고 평가된 이유다.

사실 브루탈리즘의 브루트(brut)는 잔인함보다는 ‘날 것’에 더 가깝다. 재료의 성질 그 자체를 존중하는 방식이라는 뜻이다. 브루탈리즘 이전까지 콘크리트는 대리석을 얹기 위한 도구였다. 브루탈리즘을 만나 본격적으로 스스로 빛을 발했다. 콘크리트에만 주어진 특권은 아니다. 유리, 돌, 나무, 스테인리스스틸 등 다양한 재료가 스스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됐다. 건축 재료가 그 자체로 가치를 드러낸 셈이다.

브루탈리즘이 단순하고 육중한 외면 속에서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기능이다. 브루탈리스트는 “밖에서 봐도 이 건물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흔히 건물 하중을 버티기 위해 두꺼운 벽이 있고, 이 때문에 안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브루탈리즘의 선구자’로 불리는 르코르뷔지에는 필로티 구조, 옥상정원, 긴 유리창, 자유로운 입면, 열린 평면 등을 도입했다. 그 결과 건물 안의 기능을 나누는 동시에 귀족이 아닌 평범한 사람도 집에서 햇빛을 즐기고 쾌적한 삶을 살 수 있게 됐다.

이처럼 단순한 건축 재료와 방식으로 시작된 브루탈리즘은 경제적인 건축 양식이라는 평가를 넘어 사회적이고 윤리적인 메시지까지 담고 있다. 건축가이자 비평가인 테오 크로스비는 “재료를 중요시하는 것은 건축과 인간 사이에 형성될 수 있는 친밀함에 대한 지각”이라고 평가했다. 브루탈리즘은 집과 인간의 뗄 수 없는 관계를 인정하고, 예술적 아름다움을 포기하는 대신 사회적 책임을 짊어진 셈이다.

브루탈리즘의 무심한 겉모습에는 “인간을 위한 건물을 짓겠다”는 건축가의 마음이 담겨 있다. 르코르뷔지에가 “집은 인간이 살기 위한 기계”라고 명명한 것 역시 인간에게 편리함과 쾌적함을 제공하기 위한 최적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다. ‘불편함을 느끼는 아름다움’이라면 그것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다. 재료와 인간에 대한 존중, 외관보다는 기능을 살린 상태. 더 이상 덜어낼 것 없이 균형점에 다다른 그곳이 브루탈리즘이다.
자유센터·피자힐·김옥길기념관
K브루탈리즘 성지는 여기
3년 넘게 이어진 6·25전쟁으로 ‘삭막함’만 남은 대한민국. 침묵의 건축 ‘브루탈리즘’은 전후 복원을 마친 유럽을 건너 우리에게 넘어왔다. 필연적 선택지였던 이 건축 양식은 프랑스대사관(1962년, 서울 서대문구 합동), 자유센터(1964년, 중구 장충동) 같은 작품을 거치며 ‘한국의 브루탈리즘’으로 자리 잡았다. 철근콘크리트는 한국전쟁 복구 작업, 경제개발계획 등을 거치며 핵심 건축 재료로 활용됐다. 가격이 저렴하면서도 튼튼한 건물을 지을 수 있는 자재이기 때문이다. 마감재를 붙일 경제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콘크리트의 거친 단면이 그대로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 브루탈리즘 건축이 시작된 배경이다.

1세대 현대 건축가인 김중업과 김수근은 대표적인 브루탈리스트다. 세계적 건축가 르코르뷔지에의 유일한 한국인 제자인 김중업은 프랑스대사관을 지을 때 노출콘크리트를 사용했다. 모서리가 들린 형태의 지붕에선 차가움과 한옥의 곡선미를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서울 장사동 세운상가, 미국대사관 등으로 유명한 김수근은 자유센터의 지붕 차양, 기둥, 테라스 등을 노출콘크리트로 마감했다. 서울 비스타 워커힐 호텔의 피자힐(옛 힐탑바) 건물도 김수근의 대표작이다. 피라미드를 뒤집어 놓은 듯한 이 건물은 ‘기능을 위한 외관’ 측면에서 브루탈리즘의 진수를 느낄 수 있다.

2세대 건축가가 클래딩(다른 금속을 결합한 층 모양의 복합 합금)과 같은 마감재를 사용하면서 브루탈한 건물은 잠시 모습을 감췄다. 이후 안도 다다오의 영향으로 다시금 브루탈리즘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승효상 민현식 김인철 조성룡 등 3세대 건축가는 재료의 물성을 표현하고자 노출콘크리트를 꺼내 들었다. 김인철 건축가의 김옥길기념관(1998년, 서대문구 대신동)은 브루탈리즘 의도를 잘 살린 건축물로 평가받는다. 재료와 구조를 활용해 내부 공간 가치를 높였기 때문이다. 이 건물은 문틀 모양의 콘크리트 구조물들이 세워져 있는 형태로 지어졌다. 각 구조물 사이는 유리로 막았다. 승효상 건축가의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문화영상센터, 조성룡 건축가의 지앤아트스페이스 등도 노출콘크리트 물성을 잘 살린 작품이다.

강영연/손주형 기자 yyk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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