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혜 한국WWF 사무총장

오는 8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는 제5차 플라스틱 국제협약 정부 간 협상 후속 회의(INC 5-2)를 통해 글로벌 플라스틱 규범의 윤곽이 드러날 예정이다. 이 협약은 일회용 플라스틱의 생산과 소비를 줄이기 위한 첫 유엔 차원의 구속력 있는 조약으로 향후 플라스틱 관련 규제 체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전망이다.
WWF(세계자연기금)은 시민사회를 대표하는 국제 NGO로서 협약 논의에 관여하며 기업과 정부에 실질적 이행 방안을 제시해왔다. 박민혜 한국WWF 사무총장은 최근 한경ESG와의 인터뷰에서 “국제협약이 성안되든 아니든 지금 필요한 건 준비된 민간”이라며 “자발적 감축 이니셔티브를 통해 데이터를 확보하고, 감축 시나리오를 갖춘 기업이 늘어야 협약 이행도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박 사무총장은 지난해 열린 제4차 협상 회의에 옵서버 자격으로 참석했다. 그는 “협상이 얼마나 복잡하게 얽혀 있고 이해관계가 첨예한지를 현장에서 절실히 느꼈다”며 “정부 대표단이 한자리에 모여 합의를 시도했지만, 결국 성안 문안조차 진전되지 않는 상황을 보며 깊은 무력감을 느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그는 그 시간을 ‘자발적 이니셔티브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계기’로 삼았다. 정부 간 합의가 지연되더라도 민간에서 먼저 준비를 갖춰놓는다면 협약 체계가 만들어졌을 때 실제 이행력을 가질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WWF는 국내 기업과 함께 ‘PACT(Plastic ACTion)’ 이니셔티브를 확장하고 있다.
PACT는 2019년 WWF 싱가포르에서 시작된 기업 공동 플라스틱 감축 이니셔티브로 단순한 선언을 넘어 ‘행동 기반 전략’을 중심에 두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참여 기업이 자발적 감축목표를 수립하고 실질적 진전을 이룰 수 있도록 이끌며, 전체 사업은 데이터 기반의 운영을 지향한다.
기업 플라스틱 감축, ESG 경영과 연결
WWF는 탈플라스틱 전략의 핵심으로 ‘불필요한 플라스틱 감축’을 제시한다. 박 사무총장은 “굳이 플라스틱일 필요가 없는 제품부터 감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예컨대 플라스틱 면봉처럼 대체제가 존재하고 상품성에도 영향이 없는 제품부터 생산을 금지하는 것이 출발점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일상 소비자에게 큰 불편을 주지 않으며, 기업도 기술적으로 감당 가능한 사례가 많다. 이러한 사례가 ‘감축도 가능하다’는 사회적 메시지를 줄 수 있다”고 강조했다.
WWF는 플라스틱 사용 감축과 함께 시민 인식 개선에도 나서고 있다. 최근 플라스틱 오염의 심각성을 환기하기 위해 ‘쓰레기 패션쇼’ 콘셉트의 광고캠페인도 기획했다. 동물들이 플라스틱 쓰레기로 만든 의상을 입고 등장하는 이 캠페인은 플라스틱과 야생생물의 관계를 시각적으로 강렬하게 전달하기 위해 고안됐다.
박 사무총장은 “시민들이 플라스틱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기 귀찮거나 불편하기 때문”이라며 “기억에 오래 남는 충격과 메시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예전에 거북이 코에 빨대가 박힌 영상이 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듯, ‘감정적 자극’은 여전히 유효한 방법”이라는 설명이다.

PACT는 WWF가 기업의 플라스틱 사용 감축을 넘어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까지 지원하는 핵심 수단이다. 기업별 플라스틱 사용량, 감축 수단, 재질 전환 계획 등을 제품 단위로 구조화해 수집하며 이 데이터를 기반으로 ESG 보고서 작성이나 CDP 공시에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 WWF 측의 설명이다.
그는 “기업 입장에서는 PACT를 통해 내부 데이터를 정리하고, 실제 감축 가능성과 목표치를 구체화할 수 있다. ‘우리가 1900톤밖에 못 줄였나’가 아니라 ‘1900톤을 이렇게 줄였구나’라고 설명할 수 있는 사례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PACT보다 한 단계 진화한 WWF의 ‘리소스(Resources)’ 프로그램은 감축 시나리오 설계와 모니터링을 지원하는 디지털 플랫폼이다. 글로벌 기업에만 제공되던 이 플랫폼은 최근 한국 기업에도 개방됐다. 박 사무총장은 “리소스는 팩트의 확장판으로, 플라스틱 감축 전략의 설계와 운영을 기술적으로 돕는다”며 “사실상 NGO가 무료로 제공하는 ESG 컨설팅”이라고 소개했다.
“정책의 방향은 옳다… 문제는 실행의 리더십”
박 사무총장은 정부의 리더십과 관련해서는 아쉬움을 드러냈다. “플라스틱 정책의 기본 구조는 잘 갖춰져 있다”고 평가하면서도 “국제사회에서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하는 점은 아쉽다”고 말했다. “우리는 INC 회의의 개최국이었고, 플라스틱 오염 종식을 위한 고위급 연합(HAC)에도 가입했지만, 정작 회의장에서 우리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며 “정책 방향은 옳지만, 국제무대에서 선도국으로 나설 리더십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다만 플라스틱 감축 정책 중 ‘재활용 페트의 사용 의무화’에 대해서는 긍정적 평가를 내놨다. 박 사무총장은 “이미 글로벌 기업은 이 이슈에 민감하게 반응했고, 국내 기업도 내부적으로 준비돼 있다”며 “일부는 재활용 페트를 적용한 제품 생산을 시작했고, 시장 반응도 우려만큼 부정적이지 않다”고 밝혔다.
그는 “시민들은 플라스틱 오염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있지만, 행동 변화는 여전히 어렵다”며 “정부는 정책으로 방향을 제시하고, NGO는 대중적 캠페인을 통해 행동 전환을 유도해야 실질적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인터뷰 말미에 박 사무총장은 지속가능성 활동의 ‘속도’에 대한 깊은 고민을 드러냈다. 그는 “우리가 만들어가는 변화 속도보다 자연이 훼손되는 속도가 훨씬 빠르다. ‘이 속도로 충분할까’라는 질문을 매일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다”라며 “누군가는 똑같은 메시지를 계속 말해야 한다. 정부가 바뀌고 사회 분위기가 달라져도, 이 문제의 본질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승균 한경ESG 기자 cs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