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은 청정에너지와 지식경제 경쟁 등 세계 산업 질서 재편의 기로에 서 있다. 한국의 가장 중요한 수출 부문인 반도체 제조업은 국제 기후 기준 강화, 투자자 감시 강화, 그리고 공급망 변화 속에서 탈탄소화라는 압력을 받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에너지 시스템은 여전히 화석연료에 크게 의존하고 있으며, 전력망 병목현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7월 17일 미국 존스홉킨스대 넷제로산업정책연구소에서 나온 <클린 칩- 한국 반도체 리더십 강화> 보고서는 이 같은 상황이 한국 최첨단 산업의 경쟁력을 위협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이 보고서의 주 저자인 다르시 드라우트 베하레스 박사는 카네기국제평화재단(CEIP) 한국학 펠로로, 한반도와 동북아 정치·외교 전문가다. 그는 연세대에서 국제학 석사를 마치며 한국과 인연을 맺었고, 미국 존스홉킨스대에서 정치학 박사로서 주요 언론에 한반도와 관련한 논평을 하고 있다.
베하레스 박사는 보고서를 통해 한국이 2023년 이후 ▲K-CHIPS법 세액공제 ▲첨단전략산업특별법 제정 ▲일본과의 수출 규제 해소 협상 ▲미·일·대만과의 ‘Fab-4’ 반도체 협력 강화 등 반도체 분야 리더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클린 칩을 위한 재정 및 정책적 동원이 필요하다고 내다봤다. 또 정책 설계가 긴밀히 조율되어야 하고, 법적·제도적 기반을 탄탄하게 마련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한국은 청정에너지 전환 시대에 반도체 선도적 지위를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을 택해야 한다. 또 이 보고서는 클린 칩은 한국이 반도체 제조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는 발판이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위기를 기회로 전환해온 한국의 DNA를 바탕으로 지정학적 압박을 새로운 경쟁 우위로 전환할 수 있다. 〈한경ESG〉는 베하레스 박사를 만나 한국이 앞으로 어떻게 전략을 세워야 할지 물었다.
- 한국의 반도체산업은 현재 어떤 상황에 놓여 있다고 진단하나.
“한국의 반도체산업은 대내외 압력이 겹친 ‘퍼펙트 스톰’에 직면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복귀와 함께 미국의 관세 부과 가능성이 수출에 타격을 줄 수 있으며, 동시에 중국에서 생산되는 한국 반도체의 40%가 기술 제한 위험에 놓여 있다. 한편 애플 같은 주요 고객은 2030년까지 탄소중립 공급망을 요구해 시장에 진입하는 데 장벽이 되고 있다. 이러한 무역 불안은 심각한 에너지 위기와 맞물려 있다. 한국은 전체 에너지의 80%를 해외 수입에 의존하는 상태다. 이는 에너지 안보의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 특히 반도체 제조나 데이터센터 운영을 안정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국내에서 생산할 수 있는 재생에너지 확대가 필수다. 한국의 산업은 전력 의존도가 높아 재생에너지를 안보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 인공지능(AI)과 재생에너지를 함께 본 시각이 흥미롭다.
“이 프로젝트를 에너지 전문가 존스홉킨스 정책연구소장과 공동으로 진행하고 있다. 우리는 이 프로젝트를 기획할 때 AI의 미래는 첨단 반도체 역량에 달려 있고, 첨단 반도체는 정교한 제조 역량에 달려 있으며, 제조 역량은 막대한 에너지에 달려 있다는 연결 고리를 봤다. 즉 AI → 반도체 → 제조 → 에너지로 AI와 에너지는 직접 연결돼 있다. 예를 들어, 생성형 AI를 사용할 때마다 일반적 구글 검색보다 훨씬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다. 따라서 이를 떼어놓고 볼 수 없고, 정책도 통합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이 문제는 2가지 층위를 내포한다. 첫 번째는 지속가능성 문제, 두 번째는 에너지 안보다. 특히 한국의 경우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매우 큰데, 이를 에너지 안보와 연결 지을 수 있다.”
- 에너지 안보와 관련해 한국을 둘러싸고 어떤 이해관계가 있을 수 있나.
“미국 워싱턴에서 트럼프 행정부 주변 사람들, 혹은 한국 기업과 외교관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에너지가 무역 불균형을 해소할 수 있는 분야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 이는 결국 미국산 LNG를 수출하는 문제로 귀결될 수 있다. 현재 한국의 에너지 구조에서 LNG 의존도는 매우 큰 문제다. 나는 과거 에너지 문제를 볼 때 핵에너지가 큰 이슈일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한국은 LNG 수입 문제가 더 큰 이슈다. 결론적으로, 여기에는 전략적 선택의 문제가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트럼프 행정부의 LNG 수출 확대에 맞춰 움직일지, 그리고 일본과 협력해 알래스카에 파이프라인 건설까지 연결될 것인지, 그런 선택지가 있다. 이는 전략적 선택과 관련한 문제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에너지 포트폴리오를 다양화하는 데 한계가 생길 수 있다. LNG는 지금의 필요를 채워줄 수는 있지만 결국 이런 에너지 의존에서 벗어나야 하며, 새로운 재생에너지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진정한 전략적 다변화다.”
- 이재명 정부의 결정이 중요하겠다.
“이재명 정부와 트럼프 행정부가 이념적으로 완전히 반대에 있다고 걱정할 수도 있지만, 분명한 건 이재명 대통령은 이전 진보 정권과는 다르다. 이재명 정부의 실용적이고 이해관계 기반 접근법은 오히려 트럼프 정부와 맞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유연성이고, 상대의 이해관계를 이해하는 게 핵심이기 때문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무역 불균형 문제에 집착하고 있으며, 이재명 대통령도 이를 알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의 실용주의에 대해 이야기할 때 말하는 것이 다변화다. 다른 나라와 협력하는 것도 다변화의 하나다. 중국, 미국은 물론이고 일본과도 협력하고 있다. 앞서 말한 전략적 선택을 어떻게 할지도 그의 손에 달려 있다.”
- 보고서에서 한국이 그린 반도체로 거듭나야 한다고 조언했다.
“우리가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는 한국 같은 나라가 반도체 제조나 AI를 이야기할 때 그린 반도체를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전 세계 공급망이 지속가능한 에너지로 전환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머지않은 미래다. TSMC와 인텔도 이미 더 적극적으로 그린 전환을 진행 중이다. 정부도 이를 위해 규제와 보조금을 지원하고 있다. 한국이 경쟁력을 유지하려면 이런 트렌드에 맞춰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주요 고객을 잃을 수도 있다. 이는 단순히 환경문제가 아닌, 비즈니스 전략의 문제다. 한국의 칩 구매자, 예를 들어 애플 같은 기업은 공급망 전반을 친환경적으로 만들겠다는 아주 강한 약속을 하고 있다. 애플은 트럼프 행정부가 어떻게 하든 방향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 한국의 반도체 리더들은 어떤 위기에 직면할 수 있나.
“반도체 공장은 운영비 중 상당 부분이 전력 비용이다. 일반적 팹에서 전체 탄소배출 3분의 1 이상이 전력 사용 때문이다. 2020년대 후반에는 연간 100TWh 이상 전력을 사용할 것으로 예상된다. 첨단 팹 한 곳의 전력 사용량은 중형 국가 하나의 전력 소비량과 맞먹는다. 삼성과 SK하이닉스는 RE100(100% 재생에너지 사용 목표) 이행 압력에 직면했다. 하지만 재생에너지 확보 경로가 부족하면 글로벌 고객의 기대를 충족하지 못해 클린 칩 경쟁력에서 뒤처질 수 있다. 이대로라면 반도체뿐 아니라 청정기술 가치사슬 전반에서 첨단 제조업 투자를 유치하는 데 실패할지도 모른다. 이는 국가경제 안보나 글로벌 청정 반도체 리더십 확보와 직결되는 중대한 위기다.”
- 한국이 지금의 경쟁 우위를 잃을 수 있나.
“재생에너지가 풍부한 지역에서는 전력 비용이 화석연료 기반 지역보다 2~4배 저렴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인건비나 건설비가 더 비싼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전력 단가와 탄소배출 면에서 아시아 일부 지역을 앞설 수 있다. 예를 들어 텍사스나 노르웨이의 팹이 석탄 의존도가 높은 아시아 지역보다 유리할 수 있다. 반면, 싱가포르 등 재생에너지 자원이 부족한 지역은 청정 전력 수입이나 재생에너지 크레디트 구매 등 우회책을 쓰고 있다. 지정학적 경쟁, 에너지 제약, 산업 전환이 맞물린 현 상황에서 한국은 2가지 차원의 통합 전략이 필요하다. 하나는 반도체산업과 에너지 시스템의 동시 전환이고, 또 하나는 기존 분절적 에너지 거버넌스와 높은 화석연료 의존도를 구조적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 한국은 어떤 전략을 세워야 할까.
“2가지 전략적 축이 필요하다. 첫 번째는 마이크로 타깃팅을 통해 반도체 클러스터에 청정에너지를 우선 공급하고, 대만이나 텍사스 등에 비해 인허가 지연 리스크를 해소해야 한다. 산업용 에너지 효율 기준을 강화하고, 태양광 지붕 설치 및 분산형 전력 시스템을 확보하며, 클린 칩 거버넌스로 고위급 범정부 태스크포스를 구성하는 것이 필수다. 독일식 기후·경제 통합 부처 같은 거버넌스를 만드는 것이 예가 될 수 있다. 또 하나는 그린쇼어링이다. 그린쇼어링은 청정에너지를 통해 첨단 제조업을 국내에 유치하는 것이다.”
- 그린쇼어링은 어떤 의미인가.
“현재 전 세계적으로 중요한 화두는 리쇼어링(reshoring)이다. 특히 미·중 기술 경쟁이 심해지고 기술 분리가 가속화되고 있는 만큼 한국 기업도 공장을 다른 나라로 옮기거나 한국으로 다시 가져오는 걸 고민해야 한다. 이때 중요한 건, 리쇼어링을 하면서 동시에 그린 쇼어링(green-shoring)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새로 공장을 짓거나 확장할 때부터 재생에너지를 기본으로 구축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그린 전환을 염두에 두면 뒤늦게 따라가는 게 아니라 미래를 선도할 수 있다. 단순히 공장을 옮기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설을 만들 때 아예 재생에너지 기반으로 시작하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것이 그린쇼어링의 핵심이다. 한국이 제조업을 확장하려면 먼저 그린에너지, 클린에너지, 재생에너지를 갖춰야 한다. 기존 공장을 확장하든 새로운 공장을 짓든, 처음부터 재생에너지를 써야 한다.”

- 한국은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 큰 기대감을 갖고 있다.
“산업정책 관점에서 클러스터 전략은 매우 효과적이다. 특정 지역에 생산시설, 인재, 연구센터, 에너지 인프라를 모으는 방식 말이다. 한국도 역사적으로 이런 방식에 능숙하며, 조선업, 자동차 산업 등 여러 분야에서 연구개발(R&D)과 생산뿐 아니라 인재 육성과 자본까지 포함된 종합 클러스터 시스템을 만들어 발전해왔다. 반도체산업은 팹(반도체 제조시설), 소재 공급업체, 정밀 장비업체가 집적된 클러스터에 의존한다. 여기에 청정 전력의 통합 공급은 이제 핵심 전략 요소다.”
-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 거는 기대와 한계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단지 하나만으로도 2050년까지 10GW의 전력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런데 용인 클러스터의 경우 재생에너지가 아니라 LNG 기반으로 운영하기로 결정하면서 산업 전반의 RE100 목표 달성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 기업 ASML은 한국의 ‘신뢰할 수 있는 재생에너지 전력 부족’을 투자 회피의 주요인으로 지적했다. 이제는 보조금(subsidy)과 공급망 보안(security)에 더해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이라는 세 번째 S가 반도체 전략의 기준이 되었다. 맥킨지 등에서는 이를 ‘3S 전략’이라 부르기도 한다.”
- 재생에너지는 필연적으로 송전망이 요구되는데, 한국의 경우 송전망 미비가 한계로 지적된다.
“재생에너지 그리드가 개발되는 곳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이나 유럽, 라틴아메리카도 이 같은 문제가 쟁점이 되고 있다. 에너지가 생산되는 곳과 데이터센터가 위치한 곳도 멀리 떨어져 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국가 차원의 에너지 정책뿐 아니라 지역별 전력망과 재생에너지 개발의 차이를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어,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는 재생에너지 그리드와 거리가 멀어 에너지 공급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이 부분은 앞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
- 한국은 결국 어떤 길을 가야 할까.
“지금은 단순히 미국, 대만, 일본을 따라가는 벤치마킹만으로는 부족하다. 한국은 큰 나라들을 따라가기보다는 스스로 도약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다음 세대에 스마트한 R&D와 차세대 재생에너지에 자원을 집중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이는 한국의 비교우위가 될 수 있다. 아주 중요한 분야에서 글로벌 리더가 될 수 있다. 단순히 한국의 에너지 생산과 에너지 안보를 넘어 한국이 차세대 재생에너지나 새로운 형태의 제조 기술에 투자하면 그 자체가 수출 가능한 산업이 될 수 있고, 장기적으로 경제적 파급효과도 생길 것이다. 이전에도 삼성을 비롯한 반도체 분야에서 비슷한 일이 있었다. 다른 나라들이 하는 것을 보고 배운 후 다음 단계로 도약해 글로벌 리더가 됐다. 재생에너지나 신기술 분야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가능하다고 본다.”
- 마지막으로, 한국의 정책결정자나 기업에 조언한다면.
“한국은 지금까지 잘해왔지만, 앞으로는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정책을 펴야 한다. 새로운 공장 부지를 선택할 때도 저탄소 전력 접근성이 핵심 고려사항이 되었다. 차세대 재생에너지와 기술개발을 통해 새로운 경쟁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단순히 환경문제가 아니라 산업 전략이자 경제 안보, 국가의 미래를 좌우할 수 있는 문제다. 삼성이 반도체산업에서 했던 것처럼, 지금은 에너지와 제조 융합 분야에서 그런 도약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구현화 한경ESG 기자 kuh@hankyung.com │ 사진 서범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