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자는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연인과 내 동생이 불륜 관계라니.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그 끔찍한 소문이 사실이라는 명백한 증거였습니다. 아침 일찍 연인의 집에서 나와 출근하는 동생의 모습. 그리고 동생을 배웅하는 연인의 발그레 상기된 얼굴과 흐트러진 옷매무새. 지난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누가 봐도 뻔했습니다.
골목에 숨어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남자, 베르니니의 손이 분노로 떨렸습니다. 이성을 잃은 남자는 쇠지렛대를 집어 들고 홀린 듯 동생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기회를 틈타 동생의 옆구리를 후려쳤습니다. 갈비뼈 두 개가 부러진 동생은 허겁지겁 도망쳐 간신히 성당 안으로 몸을 숨겼습니다.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였지만 성당 안에서 사람을 해치면 사형감이라는 사실이 떠올랐습니다. 그렇게 갈 곳을 잃은 분노는 연인에게로 향했습니다. 베르니니는 하인을 불러 명령했습니다. 연인을 찾아가 그녀의 얼굴에 상처를 입히라고. 하인은 그 끔찍한 명령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아무리 법체계가 느슨하고 인권 개념이 희박했던 17세기 로마라도, 이런 흉악 범죄는 중형을 받아 마땅했습니다. 하지만 교황이었던 우르바노 8세는 베르니니에게 고작 ‘벌금형’을 내렸습니다.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수준의 솜방망이 처벌. 이어진 교황의 말은 더욱 황당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으로 로마에 태어난 천재 조각가다. 그런 천재는 때때로 독특한 행동도 할 수 있는 법이다. 우리는 이런 위대한 천재를 이해하고 보호해야 한다.”

교황은 대체 왜 이런 비상식적인 판결로 베르니니를 감쌌던 걸까요. 그리고 한 가지 더. 베르니니는 과연 얼마나 천재였던 걸까요. ‘미켈란젤로 이후 이탈리아의 마지막 천재 조각가’로 불리는, 베르니니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저승의 신 하데스가 페르세포네를 납치하는 장면을 묘사했습니다. 하데스의 탐욕스러운 얼굴과 수염, 불거진 근육과 힘줄, 공포에 질린 페르세포네의 표정과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 무엇보다도 눈길을 끄는 건 매끄러운 살결, 움켜쥔 손에 눌린 허벅지 살의 디테일입니다.


차가운 대리석이 마치 인간의 살결처럼 따뜻하고 부드럽게 변해버렸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상상력과 두 손으로 직접 거대한 돌덩어리를 깎아 이 모습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이 믿어지시나요? 이 작품을 완성할 때 베르니니의 나이는, 고작 스물네 살이었습니다.
1598년 이탈리아반도의 나폴리에서 조각가의 아들로 태어난 베르니니는 어릴 때부터 천재성을 보였습니다. 예술가였던 아버지는 일찌감치 아들의 재능을 발견했습니다. 아버지의 영재 교육 덕분에 베르니니는 불과 여덟 살의 나이에도 웬만한 어른 못지않은 그림과 조각 실력을 갖추게 됐습니다. 가족이 로마로 이사한 1606년, ‘꼬마 천재’ 베르니니에 대한 소문은 이미 그곳에도 퍼져 있었습니다. “실력을 한번 보고 싶군.” 예술을 사랑했던 교황 바오로 5세가 베르니니를 직접 불렀던 이유입니다.
“사람 머리를 한 번 그려보거라.” 베르니니를 본 교황은 말했습니다. 교황은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아직 어린아이니까, 긴장해서 그림을 망치더라도 적당히 격려해줘야겠군.’ 하지만 베르니니는 미소를 지은 채 되물었습니다. “어떤 머리를 그릴까요? 남자로 할까요, 여자로 할까요? 젊은이로 할까요, 늙은이로 할까요? 슬픈 표정, 유쾌한 표정, 비웃는 인상, 호감 가는 인상, 교황 성하께서는 어떤 것을 원하십니까?” 당돌한 태도에 내심 놀란 교황은 말했습니다. “성 바오로의 얼굴을 그려보거라.”
어린 베르니니는 과감한 손놀림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불과 30분 만에 스케치가 완성됐을 때, 완성된 작품을 본 교황과 추기경들은 그 뛰어난 실력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합니다. 감동한 교황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아이는 앞으로 우리 시대의 미켈란젤로가 될 것이다. 이 아이를 잘 가르치도록 하라.” 그리고 교황은 베르니니의 손에 금화 열두 닢을 올려줬습니다. 베르니니는 평생 그 금화를 쓰지 않고 간직했다고 합니다.

베르니니는 교황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더욱 빠르게 실력을 키워갔습니다. 그는 노력하는 천재였습니다. 산 채로 불에 타 순교한 성 라우렌시오의 조각을 만들 때, 그는 자신의 허벅지를 직접 불 앞에 갖다 댄 뒤 거울로 자신의 찡그린 표정을 관찰했습니다. 라우렌시오의 얼굴을 실감 나게 묘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가 조각한 라우렌시오의 얼굴에는 찡그린 표정이 없습니다. 그러면 완성도가 더 높아진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참아 가며 연구하는 초인적인 의지, 그리고 그 결과물을 포기할 줄 아는 냉정한 예술혼. 열아홉 베르니니의 예술은 이미 이런 경지에 도달해 있었습니다.

작품이 담고 있는 내용은 이렇습니다.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태양신 아폴론은 님프(요정)인 다프네에게 반해 쫓아다닙니다. 다프네는 질색하며 도망을 다녔지만, 결국 아폴론에게 잡힐 위기에 처합니다. 그 순간 다프네는 아버지(강의 신, 페네이오스)에게 부탁해 월계수로 변합니다. 베르니니는 바로 그 순간을 잡아냈습니다. ‘드디어 잡았다’는 듯한 아폴론의 집중한 표정, 다프네의 고통에 찬 필사적인 몸부림, 이미 나무로 변하기 시작한 손과 발까지. 누구도 본 적 없는 그 광경을, 베르니니는 현실에 불러냈습니다.


이런 베르니니의 작품들은 바로크 미술로 분류됩니다. 베르니니의 ‘다비드’를 르네상스 시대의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와 비교하면, 르네상스 미술과 바로크 미술의 차이를 아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는 그 자체로 완전합니다. 거인 골리앗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고민에 빠져 있는 다비드의 모습에는 다른 상상이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이처럼 르네상스 미술은 정적이고 이성적인 미술입니다.

베르니니의 다비드는 다릅니다. 슬링(물매 혹은 투석구)의 끈은 팽팽하게 당겨져 있고, 돌은 발사되기 직전입니다. 앙다문 입과 집중한 표정, 긴장한 온몸의 근육이 마치 실시간 스크린샷처럼 그 긴박한 순간을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습니다. 관객들은 다비드가 바라보는 저편에 골리앗이 있다고 상상하게 됩니다. 돌은 곧 힘차게 날아가 골리앗의 이마에 적중하겠지요. 그러고 보니 다비드의 발도 받침대 바깥으로 나와 있군요. 이렇게 작품은 밖으로 ‘열려 있고’, 예술은 작품을 벗어나 세상으로 확장됩니다. 바로크 미술은 이처럼 역동적이고 감정적인 미술입니다. 그 중심에 베르니니가 있었습니다.



명사들과 부자들은 베르니니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베르니니가 그들을 ‘영원한 존재’로 만들어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스페인 출신의 성직자였던 몬토야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몬토야는 교황청 재판소에서 일하는 엄격한 법학자였습니다. 베르니니는 그 몬토야의 특징을 정확하게 잡아내 조각으로 만들었습니다. 작품이 완성됐다는 말을 듣고 몬토야와 함께 구경하러 온 추기경은 갑자기 몬토야의 얼굴을 만지며 장난스레 말했다고 합니다. “이게 그 조각이로군.” 이어 조각을 만지면서는 이렇게 말했다고 하지요. “이게 진짜 몬토야고 말이야.” 일종의 썰렁한 ‘아재 개그’였지만, 그만큼 조각이 실물과 똑 닮았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각이 로마 시민들의 화젯거리가 되면서 몬토야에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혹시 몬토야 선생님 아니십니까?” 길거리를 걷는 그의 얼굴을 알아보고 말을 거는 사람들이 많아진 겁니다. 베르니니의 전기를 쓴 프랑코 모르만도 교수는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베르니니가 조각상을 만들지 않았더라면 몬토야는 그가 죽은 직후 영원히 잊혔을 겁니다. 하지만 조각상 덕분에 그는 영원히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게 됐습니다.”

보르게세 미술관을 만든 스피치오네 보르게세 추기경도 베르니니의 매력에 흠뻑 빠졌습니다. 보르게세 추기경은 베르니니에게 자신의 모습을 조각으로 남겨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베르니니가 조각을 거의 다 완성할 무렵, 문제가 벌어졌습니다. 대리석 조각의 이마 부분에 금이 간 겁니다. 하지만 베르니니는 이를 부수지 않고 마무리 작업을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똑같은 조각을 하나 더 만들었습니다.
보르게세 추기경이 베르니니를 찾아왔을 때, 베르니니는 이마 부분에 금이 간 조각을 보여줬습니다. 추기경은 속으로 크게 놀라고 실망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베르니니를 너무나도 존경했기에 실망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베르니니도 아무렇지 않은 척 추기경과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리고 몇 분 후, 베르니니는 방 한쪽에 놓인 천을 잡아당겼습니다. 그 밑에는 흠집 없는 또 다른 조각상이 놓여 있었습니다. 추기경은 감격해 거의 눈물을 흘릴 지경이 됐습니다.

베르니니는 이처럼 ‘연출의 중요성’을 아는 조각가였습니다. 그는 성당 안에 들어선 신자, 대리석 앞에 선 관람자의 마음을 조종하는 재능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 베르니니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교황이었습니다. 교황 우르바노 8세는 베르니니에게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그대는 로마를 위해 만들어졌노라. 그리고 로마는 그대를 위해 만들어졌노라.”
젊은 시절의 베르니니가 가장 뜨겁게 사랑했던 여성은 코스탄차 보나렐리였습니다. 코스탄차는 베르니니가 함께 일하던 동료의 아내. 그러니까 베르니니와 코스탄차의 관계는, 불륜이었습니다. 다만 코스탄차의 남편은 이런 관계를 암묵적으로 허락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당시 유럽에서는 이런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베르니니가 30대 후반일 때 시작된 두 사람의 관계는 2년 가까이 이어집니다.

코스탄차의 조각상을 보면 베르니니가 애인에게 품었던 애틋한 감정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베르니니가 다른 사람의 의뢰를 받지 않고 스스로 제작한 유일한 조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코스탄차의 모습이 신화 속 여신처럼 아름다운 건 아닙니다. 수수한 드레스의 목 부위는 풀어헤쳐져 있고, 머리에는 아무 장식이 없습니다. 하지만 베르니니가 종교인을 주제로 만든 다른 조각과 달리, 코스탄차는 더없이 자연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조각에는 오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베르니니의 귀에는 이상한 소문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베르니니의 동생이 코스탄차와 불륜을 벌이고 있다”는 거였지요. 1638년 5월의 어느 날, 베르니니는 그 소문을 직접 확인해보기로 결심합니다. 당시 베르니니는 어머니, 동생들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베르니니는 가족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일은 아침 일찍 시골로 출장을 좀 다녀올 거야. 며칠 걸릴 것 같아.”
그리고 다음날 아침, 베르니니는 로마를 떠나는 대신 코스탄차의 집 근처에 마차를 세운 뒤 골목에 숨었습니다. 얼마 안 돼 베르니니는 집에서 나오는 동생과 그를 배웅하는 코스탄차의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소문이 사실이었던 겁니다. 베르니니는 분노와 모욕감에 치를 떨며 동생을 쫓아가 쇠지렛대로 마구 때렸습니다. 분노에 미쳐버린 베르니니에게는, 자신과 코스탄차의 관계도 불륜이었다는 사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인을 시켜 코스탄차에게까지 해코지를 했습니다.
그래도 분이 안 풀린 베르니니는 끝내 동생을 살해하기로 결심합니다. 칼을 들고 집으로 돌아온 그는 동생을 쫓아갔습니다. 어머니가 울면서 말려도 소용없었습니다. 동생은 근처 성당으로 간신히 도망쳤습니다. 베르니니는 뒤를 쫓아 성당 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성당 안에서 살인을 저지를 수 없었던 베르니니는 결국 발길을 돌렸습니다. 동생은 곧 다른 도시로 도망가 버렸습니다.
이 ‘막장 드라마’는 당시 로마에서 엄청난 이슈가 됐습니다. 몇백 년이 흐른 지금, 우리가 사건의 세부 사항을 이렇게 자세히 알 수 있는 것도 그 덕분입니다.

하지만 사법권을 갖고 있는 교황 우르바노 8세는 베르니니에게 사면장을 발급한 뒤 형식적인 벌금만 부과했습니다. 교황이 가장 사랑하는 예술가가 베르니니였다는 점이 첫 번째 이유. 두 번째 이유는, 베르니니가 교황의 이미지를 선전하는 핵심적인 인물이자 로마 최고의 예술가였다는 겁니다.
당시 로마는 유럽 전체의 정치·문화 수도가 되기 위해 프랑스, 스페인 등 다른 강대국들과 경쟁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무기는 예술. 탁월한 작품을 활용해 교황청의 권위를 과시하고 고대 로마의 영광을 되살리겠다는 게 교황청의 계획이었습니다. 전 유럽에 명성을 떨치고 있는 베르니니는 그 핵심 퍼즐이었습니다. 그러니 베르니니가 중형을 받게 된다면 교황 자신의 이미지가 땅에 떨어지는 건 물론, 로마의 위상도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베르니니는 제대로 처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얼마 안 돼 베르니니는 또 다른 사건으로 인해 예술가 생명이 위험해질 위기에 놓이게 됩니다. 이번에는 사생활 때문이 아니라, 그의 작품 때문이었습니다.

*다음 주 하(下)편에서 이어집니다. 로마 보르게세 박물관에서 사진을 보내주신 최은진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번 기사는 Bernini: His Life and His Rome(Franco Mormando 지음), 디자인 천재(제이크 모리세이 지음, 김난령 옮김), Bernini(Anna Coliva, Andrea Bacchi 지음)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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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