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오르는 게 없다”는 말이 인사말처럼 쓰이는 ‘물가판’이지만, 값이 절반 가까이 떨어진 품목도 있다. 당근이 주인공이다. 7일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농산물 유통정보(KAMIS)에 따르면 지난 4일 기준 당근(상품·무세척) 소매가격은 1㎏당 3316원으로, 전년(6028원) 대비 45% 하락했다. 평년(3942원)과 비교해도 15.9% 떨어졌다.
전례없이 가격 치솟자..."당근에 '올인'하는 농가 늘어"
농산물은 다른 공산품과 달리 가격 등락 폭이 크다. 생산량 조절을 그때그때 하기 어렵고, 날씨 영향도 크게 받는다. 농산물 과다·과소생산이 물가당국의 영원한 고민거리인 이유다. 하지만 당근처럼 가격이 1년 새 이 정도로 뚝 떨어지는 품목은 찾기 어렵다. 요즘 가격이 ‘저공비행’ 한다는 다른 엽근채소류(뿌리와 잎을 함께 먹는 채소)도 이만큼은 아니다. 지난해 ‘금(金)값’ 소리를 들었던 배추(상품)는 1포기당 3381원으로 작년(4236원)보다 20.2% 하락했고, 무(상품)는 1개당 1997원으로 1년 전(2332원)보다 14.4% 하락하면서 모처럼 ‘1000원대’에 진입했다. 양배추(상품)는 1포기당 3288원으로, 전년(4081원) 대비 19.4% 싸다. 그러나 이들 품목 모두 가격 하락 폭은 10~20% 수준이다.
당근값이 왜 이렇게 '급전직하'했을까. 농업계 관계자는 “지난해 당근값이 전례 없이 높다 보니, 다른 작물 대신 당근에 ‘올인’하는 농가가 많았다”고 말했다. 지난해 겨울 농사를 마치고 봄작형 엽근채소류를 심을 때, 양배추 같은 다른 품목 대신 당근을 재배하기로 한 농가가 늘었다는 의미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KREI) 농업관측센터의 자료에 따르면 올 7월 기준 봄 당근 재배면적은 1020㏊로, 작년보다 8.5% 늘었다. 농가는 넓어진 면적에 더 빽빽하게 심은 것으로 나타났다. 단수는 10에이커당 2610㎏으로 1년 전보다 6.0% 늘었다. 그 결과 이달 기준 당근 생산량은 2만7000t으로, 전년 대비 15.0% 증가했다.
이런 현상은 올 봄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난 현상이다. KREI 농업관측통계정보시스템(OASIS) 자료를 보면 서울 가락농수산물종합도매시장 당근 반입량은 4월로 접어들면서 평년과 작년 수준을 웃돌기 시작했다. 이때는 봄작형 당근이 본격적으로 출하되는 시기다.
'다이어트 수요' 사라졌나
문제는 당근만 생산이 늘어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지난해 값이 오르지 않은 농작물은 찾기가 어렵다. ‘역대급’ 더위에 작황이 모조리 부진해서다. 농가들은 가격에 빠르게 반응했다. 올해 노지에서 기르는 봄 무 재배면적은 941㏊로 작년보다 15.6% 늘었다. “당근으로 돌아섰다”는 봄 양배추도 재배면적이 1553㏊로, 6.5% 확대됐다. 노지 봄배추 역시 3621㏊로 17.2% 증가했다. 생산량이 늘어난 것만으로는 왜 당근값만 뚝 떨어졌는지 설명하기 어렵다.
업계에선 “‘다이어트 수요’가 꺼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해 개그우먼 신봉선 씨가 운동과 함께 당근 위주의 식단을 병행하면서 체중을 11㎏ 감량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일반 소비자들 사이에서도 당근 수요가 급증했다는 설명이다. 업계 관계자는 “지난해 당근값이 치솟던 시기와 당근 위주 식단이 큰 인기를 끌던 시기가 대략 일치한다”고 했다. 이때 불어난 수요가 올해 다시 ‘원상복구’ 되면서 가격이 더 큰 폭으로 떨어졌다는 분석이다.
공급은 늘고 수요는 줄면서 당근값은 급락했지만, 앞으로 추세는 예단하기 어렵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날씨가 변수다. 배추와 무, 양배추, 당근 등 엽근채소류는 노지에서 키우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기후 영향을 크게 받는다. 심지어 올해는 작년보다 무더위가 더 일찍 찾아왔다. 기상청은 지난 3일 정례브리핑에서 “제주 지역은 지난달 26일, 남부지방은 이달 1일 장마가 종료됐다”고 밝혔다. 제주에서 장마가 6월에 끝난 것은 1973년 전국 단위 기상관측을 시작한 이래 처음이다. 남부 지방도 장마 기간이 12~13일에 불과해 역대 두 번째로 짧았다. 장마가 빨리 끝나면서 올 6월 기온도 최고치를 찍었다. 지난달 전국 평균 기온은 22.9도로, 1973년 이후로 가장 더웠다.
이광식 기자 bumer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