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세기 한국 미술은 수많은 예술가가 별처럼 빛난 시대였다. 그중에서도 유독 찬란하게 반짝인 거장을 고른다면, 높은 확률로 두 사람의 이름이 거론된다.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인 김환기(1913~1974)와 윤형근(1928~2007). 둘의 관계는 남다르다. 서울대 미대 교수와 1기 입학생으로 맺어진 사제지간이자, 서로를 장인어른과 사위로 부른 각별한 가족이란 점에서다.
그렇지만 예술까지 닮은꼴인 건 아니다. 같은 시대, 같은 추상을 그렸지만 얄궂게도 삶의 궤적은 꽤 달랐다. 우주를 닮은 김환기의 그림이 푸른 점을 향한 비행(飛行)이라면 윤형근은 캔버스에 땅의 울음을 닮은 묵빛 인고(忍苦)를 새겼다. 일본 도쿄와 프랑스 파리, 미국 뉴욕까지 전 세계를 거닐며 화폭을 펼친 김환기와 달리 윤형근은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묵묵하게 버텼다.
두 화가의 예술은 한국 근현대미술을 관통하는 강렬한 서사 중 하나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지난달 26일 경기 과천시 막계동 과천관에서 개막한 상설전 ‘한국근현대미술 Ⅱ’에 김환기와 윤형근의 회화만 건 ‘작가의 방’을 마련한 건 이런 이유에서다. 작가 70여 명의 작품 110여 점을 통해 195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한국 미술의 흐름을 짚는 이번 전시를 이해하는 중요한 축이 바로 김환기와 윤형근이다.
관람객을 맨 처음 맞이하는 건 일본 유학 시절 그린 ‘론도’(1938)다. 음악적 리듬과 형태 실험을 보여주는 초기작이다. 산과 달, 구름, 나무 등을 절제된 색면과 점, 선의 간결한 조합으로 표현해 한국적 감수성을 담아낸 파리 시기 대표작 ‘산월’(1958), 반복되는 점과 푸른색 화면을 통해 한국적 서정성과 여백의 미를 구현한 뉴욕 시기 대표작 ‘새벽 #3’(1965~1965)로 이어진다. 40년에 걸친 작품 변화를 통해 구상과 추상의 경계에서 실험을 반복하던 1950년대 모더니즘 회화와 추상회화가 주류로 자리 잡은 1960~1970년대 한국 미술의 흐름을 함께 느끼는 건 덤이다.

제10회 상파울루 비엔날레 출품작인 이 작품은 ‘침묵의 화가’ 윤형근에게도 색깔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윤형근은 서울대 미대 재학 중 학생운동으로 제적당했고, 한국전쟁 때 피란을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서대문형무소에 복역한 적이 있다. 숙명여고 미술교사로 재직하던 1973년엔 중앙정보부장이 뒤를 봐준 부정입학 비리를 고발했다가 반공법 위반으로 고문을 받았고 이후에도 갖은 핍박을 당했다. 이듬해 아버지처럼 따른 김환기가 세상을 뜨자 이즈음부터 윤형근의 그림은 색깔을 잃게 된다.
윤형근의 청다색 회화는 한국 현대사가 남긴 발자국인 셈이다. 윤형근은 생전 이렇게 썼다. “언제부터인가 빛깔이 싫어져서 빛깔을 지워 버렸다… 그림이 반드시 색이 많다고 아름다운 것이 아니지 않나. 내면이 아름다운 것이 진짜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된다.”
박생광, 박서보, 이우환, 박이소, 서세옥, 이불, 이성자 등 기라성 같은 작가들의 작품도 전시회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미술관 수집 후 최초로 공개되는 작품이 11점에 달한다.
특히 눈여겨볼 건 17점의 ‘이건희 컬렉션’이다. 이 중 일부는 해외 순회전에 나갈 예정이어서 서둘러 감상할 필요가 있다. 안상철의 ‘청일’(1959)은 미국 스미스소니언 아시아 미술관에, 신학철 ‘한국근대사-종합’(1982~1983)은 영국 브리티시 뮤지엄 전시에 각각 출품된다.
과천=유승목 기자 mo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