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이란에서는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모두의 예상을 깨고 보수 강경파인 아마디네자드가 다시 한번 대통령이 되었다. 부정선거였음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최고권력기구는 요지부동이었고, 분노한 젊은이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정부는 이에 탄압으로 응수했다. 지나가던 여대생 네다 솔탄의 비극적인 죽음처럼, 가혹하고 무차별적인 방식으로. 7월 말 네다 솔탄의 추모식이 열렸고 그에 참석한 파나히 감독은 체포되었다. 많은 대학생과 지식인들, 비판적인 언론인들이 체포되고 징역을 살고 사형선고를 받던 시기였다. 결국 파나히 감독은 징역 6년을 선고받고 20년간 출국을 금지당하면서 언론 인터뷰와 영화 촬영, 제작 또한 금지 처분을 받게 된다. 더 이상 자유롭게 영화를 찍을 수 없게 된 상황에서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아이폰과 소규모 디지털카메라를 활용하여 몰래 영화 제작을 계속해왔다.

<3개의 얼굴들>은 스마트폰 영상의 세로 화면비로 비춰지는 소녀의 다급한 얼굴로 시작된다. 좁고 답답하며 노이즈가 잔뜩 낀 화면 속에서 스스로를 ‘마지예’(마지예 레자에이 扮)라고 소개한 아이는 자신이 시골 마을에서 자라왔으며 배우가 되는 것을 반대하는 부모님과의 거래 조건으로 약혼을 했고, 열심히 공부한 결과 테헤란의 예술학교에 수석으로 입학 허가를 받았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합격 사실을 알게 된 가족들이 태세를 바꾸어 진학을 허락해주지 않는다면서 뜻을 거슬러 학교에 간다면 자신은 죽게 될 거라고 울먹인다. 마지예는 TV 연속극의 주연배우로 누구도 모르는 사람이 없는 ‘자파리’(베흐나즈 자파리 扮)에게 몇 번이고 메일을 보내 가족들을 설득해달라고 부탁했지만, 자파리의 회신은 없었으며 때문에 자신은 유언이 될 이 영상을 보낸 뒤 자살로 생을 마감할 거라고 예고한다. 마지예는 밧줄에 목을 걸고 발을 구른다.
화면이 전환된다. 초췌한 얼굴의 여성이 운전석 뒤에 앉아있다. 히잡 아래 불꽃과도 같은 화려한 색의 머리카락이 구불거린다. 마지예가 영상 편지를 보낸 대상인 배우 자파리다. 파나히 감독을 통해 영상을 전달받은 자파리는 이전 스마트폰의 모든 기록을 뒤져봤지만, 마지예가 보낸 문자나 메일은 발견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자파리는 이 영상이 한 소녀의 장난에서 비롯된 연출일 거라고 의심하면서도 감독과 함께 마지예의 고향마을로 향한다. 그곳은 페르시아어가 통하지 않을 만큼 깊은 산악지대다. 어머니로부터 배운 아제르바이잔어를 더듬더듬 말할 수 있는 파나히 감독이 자파리와 마을 사람들 사이의 유일한 교량이 된다.

두 사람은 마을에 그 어떤 죽음이나 매장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마지예가 마을 사람들로부터 ‘시건방진 것’ 취급을 받는다는 것도 알게 된다. 벽촌의 주민들은 인기배우 자파리와 영화감독인 파나히가 “필요한 것을 주러 왔다”고 생각하여 환대하지만, 두 사람이 마지예를 찾아왔다는 사실을 밝히자마자 불쾌해하며 등을 돌린다. 마지예의 집에는 누나가 제 소유인 양 날뛰는 난폭한 남동생(당장에라도 명예살인을 저지를 것만 같고, 실제로도 실행에 옮기겠다고 주장하는)과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린 여동생, 아들을 제지할 힘이 없는 연약한 어머니가 있다. 두 사람은 영상 속 마지예가 언급했던 ‘마에데’라는 사촌도 만나지만 마에데는 마지예가 실종된 것조차 모르는 양 보인다.
우여곡절 끝에 마지예가 나타난다. 마지예는 무사했고, 역시 마을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는 노파 ‘세헤라자데’의 외딴집에 숨어 있었다. 영상은 자파리를 유인하기 위한 가짜였지만 진로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될 막막한 상황에 놓여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자신이 소녀의 자살에 책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눈물을 보일 만큼 마음고생이 심했던 자파리는 애원하는 마지예를 마구 때리고 욕한 뒤 그 자리를 벗어난다.

마을을 떠나는 두 사람의 차는 오래 가지 못하고 멈춘다. 좁은 길의 정중앙에 주저앉은 다친 소 때문이다. 산등성이의 비포장도로는 차 두 대가 나란히 지나갈 수 없을 만큼 좁은지라, 마을 사람들은 경적을 울려 신호를 주고받는 규칙을 만들었다. 한 번 누르면 “나 지나간다”, 두 번 누르면 “급하니까 양보해달라”, 그 뒤 한 번을 더 길게 누르면 “정말 급한 일이니 꼭 지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파나히 감독은 앞서 마을 사람에게 배운 대로 경적을 울리지만, 길을 가로막은 것이 차가 아닌 소인 이상 신호가 받아들여질 리가 없다. 소의 주인은 차라리 안락사를 시키라는 감독에게 이 소가 어떤 소인 줄 아느냐고, 번식력이 왕성하기로 유명한 ‘황금 씨알’의 소라고, 바로 다음 날로 예정된 마을 축제에서 어린 암소들을 잔뜩 실은 트럭이 올 텐데, 한탕 벌 기회를 놓칠 순 없다고 거절한다. 자파리가 조수석에서 내린다. 말 못 하는 소의 곁으로 다가가 가만히 그 얼굴을 지켜보던 자파리는 문득 차를 돌려 다시 마을로 돌아가자고 말한다. 마지예의 고통에 자파리 자신의 고통을 포개어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마지예가 사흘 동안 가출하고도 발각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세헤라자데의 집이 마을에서는 공공연한 금단의 영역이기 때문이었다. 세헤라자데가 1979년 혁명 이전, 이란의 여성들에게 히잡이 강제되기 전 젊은 시절에 영화에 출연해서 춤을 췄다는 게 이유다. 촌장 등 남자를 주축으로 한 마을 사람들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세헤라자데는 들판에 나와 그림을 그리거나 시를 쓰고, 벽에는 과거 자신이 출연했던 영화 포스터를 붙이는 등 본인만의 세계를 지켜나간다. 그만큼 예술을 사랑하는 그녀가 배우를 그만두고 폐쇄적인 산골 마을로 들어오게 된 것은 이란 영화계의 감독들(분명코 전부 다 남자였을)에게 받은 상처 때문이라는 사실이 지나가듯 언급된다.

남성이자 영화연출자인 파나히 감독은 세헤라자데에게 썩 달갑지 않은 존재다. 때문에 감독은 세헤라자데의 장소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받지 못하며, 카메라 또한 집 외관만 보여줄 뿐 내부와 집주인의 얼굴은 보여주지 못한다. 젊은 마지예가 스마트폰 영상에 얼굴을 비췄고, 중년의 자파리가 TV 매체에 출연하는 데 비해 과거를 삭제당한 존재인 세헤라자데는 시네마의 영역에서조차 재현되지 않는다. 이는 도피가 아닌 능동적 거부이자, 가부장적인 이란 사회에서도 남성들의 시선 밖에 독립적인 여성장(場)이 존재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강력한 저항이다. 마지예와 자파리만이 세헤라자데의 작은 세계에 입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둘이 이란 여성의 세대를 대표하는 얼굴들로서 세헤라자데가 겪었던 과거의 아픔을 공유하고, 미래를 공모할 수 있는 젊은 여성 예술인이기 때문이리라.
이튿날 자파리는 마지예와 함께 아이의 집으로 향하고, 감독은 홀로 차에 남는다. 마지예를 찾는 여정은 자파리와 파나히 감독이 함께였지만, 마지예의 일을 해결하는 과정에서는 감독이 빠지게 된다. 폭력이 지나간 자리에는 폐허가 남는다. 그를 재건하고 화해시키는 것은 여성들의 몫이다. 완고했던 세헤라자데마저도 감독에게 자파리의 손을 빌려 자신이 직접 쓴 시집을 건네며 화해의 제스처를 취한다.
그렇다고 남성들로부터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파나히 감독은 자기 집에서 하룻밤 묵고 가라는 마을 남자들의 친절한 초대를 받고(거부한 결과, 다 들리도록 뒷말도 듣고), 아들의 후견인이 되어달라는 정중한 요청과 함께 포장된 꾸러미도 받는다. 꾸러미 안에 들어있는 것은 소금에 절인 남자아이의 귀두 포피다. 꾸러미를 건넨 노인은 할례 의식 때 잘라낸 살점을 ‘좋은 곳’ 근처에 묻으면 아들의 미래도 덩달아 밝아질 거라는 미신을 믿고 있다. 그 결과, 아이의 얼굴을 보지도 못한 유명 감독에게 후견인이 되어 포피를 책임져 달라는 부탁을 하게 된 것이다. 전작 <택시>와 근작 <노 베어스>에서 그러했듯이 감독은 미신에 깊게 빠진 사람들의 부탁을 조롱하거나 거부하기보다는 연민을 품은 비판적인 거리두기의 시선 아래 수용하는 쪽을 택한다. 한 사람 더, 감독의 차창을 뚫어져라 노려보는 젊은 남자가 있다. 마지예가 배우가 되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하던 그 남동생이다. 부모가 제 누나 편을 들기 시작하자 분을 못 이겨 날뛰는데, 건장한 체격의 청년이 어째 하나도 위협적이지 않다. 그는 눈에 띄게 풀이 죽어 있지만 집요한 시선에서는 폭력을 향한 끊임없는 갈망이 느껴진다.

다음 장면에서 자파리와 파나히 감독은 다시 함께다. 두 사람은 차를 타고 수도로 돌아가는 중이다. 차 전면 유리창의 우측 하단부에는 전에 없이 깨진 부분이 있는데, 마지예의 남동생이 작별을 기념해 만들어준 듯하다. 자파리가 바람을 쐬고 싶다며 내려서 걷겠다고 말한다. 카메라는 운전석의 위치에서 감독의 시선으로 고정된 채, 천천히 저 너머로 이동하는 자파리의 뒷모습을 롱테이크로 담는다. “자파리님! 자파리님!” 자파리를 소리쳐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하얀 히잡을 휘날리며 마지예가 뛰어오고 있다. 자파리는 잠시 멈춰서 마지예가 자신을 따라잡도록 기다린다. 손을 꼭 잡고 함께 걷는 두 사람을 카메라는 묵묵히 지켜본다. 남근의 살점이 담긴 꾸러미와 금이 간 차창 또한 앞서 걸어 나가는 두 여성의 뒤편에 덩그러니 남겨져 있고, 어린 암소들을 실은 트럭이 마주 다가오고 있다. 전날 만난 소 주인이 말했듯이 축제가 열릴 것이고 교배가 시작될 것이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은 <택시>에서 이란 사회의 지배적인 질서가 사회와 그 구성원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스며들어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주었다. <3개의 얼굴들>에서 감독이 비판하는 대상은 잔존하는 가부장제로 옮겨간다. 감독은 마지예와 자파리, 세헤라자데를 통해 남성적 지배 질서에 의해 통제되는 이란의 문화예술계와 각각의 가정이 여성 문화예술인들에게 얼마나 가혹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이들 중 가장 나은 처지인 자파리마저도 마지예가 걱정되어 촬영장을 무단이탈했다는 이유로 스태프한테 심한 욕설을 듣는다. 문화예술 분야에 종사했거나 종사 중인, 혹은 종사하고자 하는 이란 여성들에게 삶의 위협은 일상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감독은 여성들을 지배하고 억압하며 착취하는 가부장제가 좌초되어가는 선박이나 다름없는 상황임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다. 예술의 가치를 알고 서로를 도우며 대화로 갈등을 해결하는 여성들에 비해 영화 속 남성들은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길을 넓혀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자기들만의 폐쇄적인 신호를 개발하여 불편한 통행을 거듭하고, 촌장이 시키는 대로 손님에게 묵어갈 것을 권하지만 손님의 거절을 받아들일 아량은 부족하며, 구시대적인 미신과 폭력의 맹아(盲啞)―오랜 세월 보관한 포피와, 분풀이로 만들어진 깨진 유리창―들이기도 하다. 그들의 무용한 사고방식과 일상화된 폭력성은, 프로이트가 말하는 파괴본능이 갈 길을 잃고 고착된 결과로서의 퇴행처럼 보인다. 병든 수소는 착취와 퇴행의 메커니즘에 가담하는 남성들이 종국에 가서는 희생자로 전이되어 파멸을 면할 수 없을 것임을 예고하는 은유나 마찬가지다.
파나히 감독 본인도 예외는 아니다. 선의를 가지고 영화 속 여성들을 돕는 입장이라고는 하나, 그 또한 남성중심적인 이란 사회와 문화예술계에서 알게 모르게 수혜를 받았을 사람이다. <3개의 얼굴들>은 그와 같은 연대 책임을 결코 좌시할 수는 없다는 점을 중반부부터의 엄격한 공간 분리, 그리고 해석 주체로서의 역할 박탈을 통해 보여준다. 허구와 다큐멘터리 형식이 혼합된 자파르 파나히 특유의 연출 방식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며, 전반부에서는 재현 행위 자체를 성찰하는 메타시네마적 장치로 작동하고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이란 사회의 젠더 권력 구조를 고발하는 비판적 리얼리즘으로 전환된다.

엔딩에서 나란히 앞서 걷는 자파리와 마지예의 모습을 보면, 파나히 감독은 새로운 질서를 추동할 주역은 남성이 아닌 여성이 될 것이고 이들은 세대를 넘어서 연대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듯하다. 그런 한편 씨받이로 소모될 운명에 놓인 어린 암소들이 있다. 너무도 당연하게 운용되어왔으나 생각해볼수록 잔혹하기 짝이 없는 굴레다. 이 굴레가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 받아들여지려면 얼마나 오랜 노력이, 많은 희생양이 필요할까. <3개의 얼굴들>은 꺼림칙한 생산과 재생산의 연쇄를 최종 청사진에 끼워 넣음으로써 그 암소들과 같은 처지에 놓여있는 이란 여성들은 여전히, 너무도 많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이태인 영화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