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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응축할 수 없는 서정시의 극치 [고두현의 아침 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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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춘

랑은
이음새가 좋은 말
너랑 나랑 또랑물 소리로 만나서
사랑하기 좋은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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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84세인 서정춘 시인의 제7 시집 <랑> 첫머리에 나오는 표제작입니다. ‘랑’이라는 말의 둥근 어감에다 ‘이음새가 좋은 말’이라는 의미까지 절묘하게 어우러진 작품이지요. 고도로 응축된 언어로 서정의 극치를 보여주는 시입니다.

여기에서 ‘랑’은 ‘너랑 나랑’을 이어주는 ‘사랑’의 접속 조사이면서 ‘또랑물 소리’로 우리와 세상을 이어주는 연결 고리입니다. ‘시인이랑 독자랑’ 이어주는 교감의 이음새이기도 합니다. 이 시의 후속편이라 할 수 있는 ‘피아노랑’이라는 시를 볼까요.

‘〈피아노랑〉은 피아니스트 박지나 님이 서정춘의 시 「랑」에서 영감을 얻어 여러 또랑물 소리를 모시고 연주 동아리 이름을 지은 거다// 정녕, 랑은 이음새가 긴 온음표 같은 것’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조사 하나에서 이렇게 놀라운 세계를 펼쳐내다니, 대단한 경지입니다. 이번 시집에는 이처럼 짧고도 웅숭깊은 시가 31편 실려 있습니다. 시만 짧은 게 아니라 수록 편수도 다른 시집의 절반밖에 되지 않습니다.

시집 앞머리의 ‘시인의 말’ 또한 짧습니다. ‘아하, 누군가가 말했듯이/ 나도 “시간보다 재능이 모자라 더 짧게는 못 썼소.”’ 이전 시집 <이슬에 사무치다>의 ‘시인의 말’에 썼던 말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 이상 더 응축할 수가 없다는 뜻이지요.

이 같은 시적 염결성은 그의 인생 전체를 관통합니다. 1941년 전남 순천에서 마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가난과 독학으로 시의 길을 헤쳐왔습니다. 신문 배달 중에 우연히 집어든 영랑과 소월의 시집을 밤새 필사하며 공부했고, 매산중고 야간부 시절에는 300편 이상의 시조를 ‘써제꼈’습니다.

그렇게 무사독학으로 시에 매진한 결과 1968년 신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습니다. 이후 동갑내기 고향 친구인 소설가 김승옥의 추천으로 동화출판공사에 들어가 꼬박 28년을 일하고 정년퇴임하면서 첫 시집 <죽편>을 펴냈습니다. 등단 28년 만이었지요.

당시 첫 시집에도 ‘극약같이 짧은’ 시 35편만 묶었습니다. 그때까지 서랍 속에 모셔뒀던 70여 편 중 절반을 버렸습니다. 대표작 ‘죽편(竹篇) 1-여행’은 여관방 벽지에다 쓴 시였습니다.

‘여기서부터, -멀다/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를 타고/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 년이 걸린다.’

백 년 인생을 대나무에 비유한 명편 중 명편이지요. 우리 삶이 수없는 마디로 이어지듯이 대나무 마디는 인생사를 닮았습니다. ‘여기서부터’ 하고 쉼표를 찍어 한 박자 쉰 다음 하이픈을 그어 ‘대꽃이 피는 마을’이 얼마나 먼지를 절묘하게 표현했으니, 5행 37자 압축미의 극치입니다.

이 시와 대구를 이루는 듯한 시가 이번 시집에 실려 있군요. ‘미생(未生)’이라는 시입니다.

어느 날도 대나무가 즐비한 오솔길의 끝자락에
빈 오두막 한 채를 보아 온 적 있나니
이승살이 끝난 뒤 그 집 찾아 들어가
도로 아미타불 빈털터리 목탁도 때리며
대나무 나이로 한 백 살 가까이 살아볼 거다
불경 같은 불경스런 시를 쓰면서,


예전에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로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 년이 걸린다’고 했는데, ‘이승살이 끝난 뒤’에도 ‘불경 같은 불경스런 시를 쓰면서’ 또 ‘백 살 가까이 살아볼’ 요량이라니 그 먼 생의 여정은 여전히 미완입니다.

시인의 길은 구도와 수행의 길이기도 합니다. 5년 전 펴낸 여섯 번째 시집 <하류>에서 그가 했던 말을 떠올려 봅니다. 그때 ‘시인의 말’도 단 두 줄이었습니다. ‘하류가 좋다// 멀리 보고 오래 참고 끝까지 가는 거다’

이런 자세로 시의 물길을 트고, 강의 발원지인 상류에서 바다와 맞닿은 하류까지 ‘멀리 보고 오래 참고 끝까지 가는’ 그에게 한국 문단은 “박용래의 따뜻한 서정(내용)과 김종삼의 언어 경제(형식)가 하나의 몸을 이루어 발뒤꿈치를 들어 올릴 때, 서정춘의 가장 빼어난 시 몇 편이 태어난다”는 찬사를 보냅니다.

첫 시집 <죽편>에 실린 시 한 편을 더 감상하면서 짧은 시가 주는 긴 울림의 묘미를 오랫동안 음미해 보겠습니다. 그가 열여덟 살에 고향을 떠나 서울행 야간열차를 탈 때 가난한 아버지가 들려준 말씀을, 쉰 무렵에 회상하면서 시화한 것입니다.

30년 전
-1959년 겨울

어리고, 배고픈 자식이 고향을 떴다

-아가, 애비 말 잊지 마라
가서 배불리 먹고 사는 곳
그곳이 고향이란다




■ 고두현 시인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 등 출간. 김달진문학상, 유심작품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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