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세기 말 파리 오페라 극장. '오페라의 성지'로 꼽히는 이곳에는 유일하게 허락되지 않은 공간이 있었다. 화려함으로 둘러싸인 극장에서 유일하게 짙은 어둠이 깔린 공간. 지하로 깊숙이 이어진 계단을 따라 내려간 이는 영영 돌아오지 못한다는 말이 돌았다. '팬텀'이라는 이름의 유령이 산다는 괴소문과 함께.
뮤지컬 '팬텀'이 10주년 공연으로 관객과 만나고 있다. '팬텀'은 기자였던 가스통 르루가 파리 오페라극장 지하에 미확인 감옥이 존재한다는 기사를 접한 뒤 쓴 소설 '오페라의 유령'을 원작으로 한다.
앤드류 로이드 웨버가 작곡한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과는 다른 작품이다. 토니상 수상 작가인 아서 코핏과 작곡가 모리 예스톤이 합작한 '팬텀'은 '오페라의 유령(1986)'이 영국 런던에서 초연된 지 약 5년 뒤인 1991년 미국에서 초연했다. 한국에서는 2015년 충무아트센터 대극장에서 처음 공연해 올해로 10주년을 맞았다.
'팬텀'은 천재 음악가이지만 흉측한 외모 때문에 파리 오페라극장 지하에 숨어 사는 팬텀(에릭)이 천상의 목소리를 지닌 크리스틴 다에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고독하고 차가운 지하 세계에서 자신을 구원해 줄 이를 기다리던 팬텀의 귓가에 어느 날 맑고 투명한 크리스틴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길거리에서 노래하던 그녀에게 파리 오페라극장은 오랜 시간 마음에 품어온 '꿈의 무대'이자 쉼 없이 음악이 흐르는 고향과도 같은 곳이었다. 오페라극장의 최고 후원자인 필립 드 샹동 백작의 눈에 띄어 꿈의 공간에 발을 들인 크리스틴의 목소리는 팬텀의 마음을 녹였다. 팬텀에게 크리스틴은 구원의 목소리이자 천사의 목소리였다. 크리스틴은 팬텀의 지도하에 디바로서의 역량을 쌓기 시작했다. 조건은 하나. 그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것. 크리스틴 앞에서 팬텀은 늘 가면을 쓴 채였다.
팬텀의 선창에 크리스틴의 후창이 이어지면서 클래식한 성악의 매력이 펼쳐진다. 섬세하게 시작돼 고음까지 시원하게 뻗어나가는 팬텀의 단단한 보컬, 크리스틴의 아름다운 소프라노 무대가 단숨에 몰입도를 끌어올린다. 가수 박효신을 제외하고 팬텀 역의 카이·전동석, 크리스틴 역의 이지혜·송은혜·장혜린 모두 성악 전공자들로, 작품이 지닌 오리지널리티를 살리는 캐스트로 꾸려졌다.
초연부터 팬텀 역을 맡아온 카이는 때로는 편안하게, 때로는 강인하게 소리를 내며 캐릭터와 혼연일체 된 모습을 보여준다. 이지혜는 청명하면서도 날카롭게 고난도의 소프라노 기교를 소화해 여러 차례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에 23인조 오케스트라 연주가 더해져 풍성함을 더한다.



성악 뿐만 아니라 발레도 수준 높은 퀄리티를 자랑한다. 대한민국 대표 발레리나 김주원을 비롯해 유니버설 발레단 수석무용수로 활동한 황혜민, 2015년 초연부터 2021년까지 세 시즌의 무대에 오른 최예원, 전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정영재, 전 국립발레단 솔리스트 김희현, Mnet '스테이지 파이터'에 출연해 대중성을 인정받은 김태석 등이 참여한다.
예술적 경험의 폭을 다각적으로 넓히는 또 다른 축은 무대다. '팬텀'의 배경인 오페라 가르니에는 17층·2200석 규모로 세계 3대 오페라 극장 중 하나다. 건축가 샤를 가르니에가 공들여 설계한 곳으로 완공에만 14년이 걸렸다. 특히 천장에 있는 화려한 샹들리에, 마르크 샤갈이 그린 천장화로 유명한데, '팬텀'은 이러한 디테일도 놓치지 않았다. 프로시니엄 최상단부에서 거대한 샹들리에가 빛을 내고, 실제 공연장 뒷편에 들어선 듯 갤러리(무대 주위의 벽에 설치되는 통로)를 연상케 하는 세트와 프랑스 파리를 옮겨다 놓은 듯한 무대 미술 등이 시선을 끈다. 무대를 위아래, 양옆, 안쪽까지 넓게 활용해 규모감도 한껏 키웠다. 크리스틴의 데뷔를 팬텀이 무대 하수 맨꼭대기에서 바라보는 등 공간을 최대로 활용했다.
전개의 전환점이 되는 1막의 마지막 장면은 관객들에게 확실한 인상을 남긴다. 추락하는 샹들리에, 이후 쓰러진 크리스틴을 지하세계로 데려와 배에 태운 채 나아가는 팬텀의 모습까지 웅장함과 아련함이 일순간 휘몰아친다. 전체적인 서사도 한국 관객들이 부담 없이 선호할 흐름을 갖췄다. 팬텀 개인의 감정에 동화될 수 있도록 가정사를 다루고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해 여운을 남긴다.
'팬텀'은 오는 8월 11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계속 공연된다.
김수영 한경닷컴 기자 swimming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