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 대선에선 현수막·벽보 등을 훼손한 선거사범만 1907명에 이른답니다. 지난 대선보다 3.1배 늘어난 수준입니다.
투표를 독려하고 유권자의 알 권리를 충족시켜야 할 현수막과 벽보가 실험대에 올랐습니다. 선거 때마다 천문학적인 세금이 쓰이는데, 유권자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보단 갈등과 혐오를 부추기는 종이·천 조각으로 전락한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된 것입니다.

벽보·현수막 등에 들어가는 세금도 수십억 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됩니다. 현수막은 후보마다 전체 읍면동 수의 2배 이내로 현수막을 게시할 수 있습니다. 국내 행정구역은 17개 광역시도, 260개 시군구, 3501개 읍면동으로 구성됐습니다. 현수막은 선택사항이지만, 이번에 총 7명의 후보가 이름을 올린 후보들이 전국에 최대한으로 현수막을 달았다면 산술적으로 현수막 약 5만개가 달렸을 겁니다.
과거 각종 선거에서 거리 게시용 현수막의 통상거래가격(제작·설치·철거비 포함)이 1제곱미터(㎡)당 약 1만5000원인 점을 고려하면, 5미터(m) 현수막의 가격은 개당 대략 7만5000원 정도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선거마다 정당별로 거리 게시용 현수막에만 5억 이상의 세금이 투입되는 셈입니다.
선거 벽보는 대선 때마다 100만 부 이상이 쓰입니다. 17대 대선 116만 부, 18대 대선 66만 부, 19대 대선 136만 부, 20대 대선 126만 부가 선관위에 제출됐습니다. 10명 이상의 후보가 나타난 대선의 경우, 선거벽보(사이즈 76 x 52센티미터(㎝))만 일렬로 쭉 세워놓으면 약 960km, 서울-부산 왕복보다도 긴 줄이 됩니다.

세금이 아무리 많이 들어가도 유권자들이 효능감을 느낀다면 문제가 없을 겁니다. 하지만 혈세 누수 탐지기(혈누탐)팀이 만난 대다수 유권자는 현수막·벽보에 필요성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직장인 김성전(29)씨는 "선거가 있다면 다양한 방법으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서도 "세금 써서 제작하는건데 지금 방식이 결코 최선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전했습니다.
실제 입법조사처는 2023년 보고서를 통해 "무분별한 정당 현수막 난립은 정당 활동 홍보가 아닌 정치를 외면하게 하는 요인으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특히 최근처럼 정치가 양극단을 달리고 있을 때는 갈등과 혐오를 자극할 우려가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했습니다. 실제 경찰도 이번에 현수막·벽보 훼손 등 선거사범 증가 요인 중 하나로 진영 간 갈등을 꼽았습니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공해 수준의 용어들이 쓰이면서 갈등을 부추기는 측면이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그래도 현수막이나 벽보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없진 않습니다. 조은옥씨(78)는 "붙여놔야 선거하는 맛이 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주요 정당, 인물 말고 나머지는 모른다. 현수막이나 벽보를 보고 '아 저런 사람도 나왔구나' 싶어서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선거 때나 아니나 현수막 등 때문에 공무원들의 스트레스도 이만저만이 아니랍니다. 오죽하면 서울 강남구에서는 한 공무원이 독학으로 익혀 현수막 관리 프로그램 개발까지 한 사례도 나왔습니다. 다른 시급한 치안에 집중해야 할 경찰이 현수막·벽보도 신경 써야 하는 행정력 낭비는 덤입니다.
재활용도 어려워 환경 오염 문제도 야기하고 있습니다. 특히 현수막은 각 지자체에서 재활용 방안 등을 강구하고 있지만 재활용 비중 30%도 안 되는 곳이 대부분입니다. 주성분이 폴리에스테르와 같은 플라스틱 합성수지인데, 태우면 다이옥신 같은 유해 물질이 나온답니다. 대부분 재활용으로 만들어지는 물건은 공공 쓰레기 처리 마대용 등입니다. 재활용엔 소각보다 더 큰 비용이 들어가고 있어 재활용도 꺼려지는 분위기입니다. 코팅된 벽보도 재활용이 어렵긴 마찬가지입니다. 재활용되지 못하는 것들은 결국 각 지자체 창고에 쌓이게 됩니다.

진일보한 생각입니다. 하지만 혈누탐팀은 전문가들과 함께 조금 다른 제언을 해보고자 합니다. 디지털 시대로 갈수록 실효성이 떨어지는 선거홍보물을 애당초 쓰지 않거나 최소화하는 방안을 강구해보는 것은 어떨까 하고 말입니다.
선거 때 다른 나라들은 어떻게 하는지 살펴보기 위해 미국·대만·아르헨티나·일본·엘살바도르·핀란드 등을 다 방문했다는 이 교수는 "한국같이 현수막 많이 거는 나라는 없다"며 "한국 유권자들이 이미 선거 관련물을 많이 접하는 TV·신문·유튜브 등 매체를 더 활성화하고 과거 형식의 현수막·유인물 등 홍보는 줄이거나 없애는 식으로 가는 게 어떨까 싶다"고 강조했습니다.
김춘식 한국외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은 벽보가 사라지면 거의 정치에 대해 접할 기회가 없다"는 우려를 제기하면서도, 외국에 비해 한국의 선거 홍보 방식에 규제가 많다는 점을 짚었습니다. 공직선거법에 따라 후보들의 광고 게재 횟수는 TV·라디오 각각 30회, 신문 70회로 제한되고, 인터넷광고는 인터넷 언론사에만 가능합니다.
세계 주요국들은 대체로 선거법에 선거운동에 대한 세부 규정이 많지 않아 다양한 유형의 선거 문화가 발달했는데, 한국은 공직선거법에서 현수막과 벽보를 선거운동의 수단으로 명시하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트렌드는 온라인 선거운동입니다. 지난해 6월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여론조사 결과 유럽의회 선거에서 프랑스의 18~34세 젊은 유권자의 32%가 극우 국민연합(RN)을 뽑으며 당시 압승을 뒷받침했다고 보도했는데, 그 배경에는 틱톡·인스타그램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적극적으로 활용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시대의 흐름과 세계 주요국 추세에 맞춰 우리 선거 문화도 변화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혈누탐팀은 선진적이고도 세금 낭비 없는 대한민국 선거를 기대합니다.
신현보/이민형 한경닷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