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중이 공동으로 관리하기로 한 서해 잠정조치수역(PMZ)이 사실상 중국의 일방적 실효지배 공간으로 변질되고 있다.”
중국이 서해 잠정조치수역(PMZ)에서 시추공을 확보하는 등 일방적으로 자원개발을 시도한 것에 대한 전문가들의 평가다. 일각에서는 앞으로 해양 경계를 확정하는 협상이 본격화할 때 중국이 실효적 지배를 주장하는 근거로 시추공 실적을 내세울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2일 학계와 석유가스 탐사정보 플랫폼 S&P EDIN에 따르면 중국은 2009년과 2015년 잠정조치수역에서 시추 작업을 했다. 한국과 중국이 ‘한중어업협정’을 통해 해당 지역을 잠정조치수역으로 확정한 2001년 이후다.
잠정조치수역은 한·중이 해상 경계를 확정하지 못한 상황에서 권리 행사를 유보해 놓은 수역으로, 일방적인 자원 개발이나 어업 활동이 금지돼 있다. 그동안 중국이 잠정조치수역에 해상 구조물을 무단 설치해 해양 영토를 확대하려 한다는 논란은 있었지만, 실제 자원 개발 활동을 한 사실이 드러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중은 어업 분쟁을 조정하기 위해 2000년 한·중 어업협정을 체결했다. 이때 양국의 200해리 배타적경제수역(EEZ)이 겹치는 구역을 잠정조치수역으로 설정하기로 합의했다. 원칙상 해당 수역에서는 일방적인 자원 개발과 어업 활동이 제한된다. 그러나 협정이 발효된 2001년 이후에도 중국의 일방적인 시추 행위가 이뤄졌다는 사실이 이번에 확인된 셈이다.
이와 관련해 한 자원 개발 전문가는 “중국의 시추공 확보는 분쟁 수역에서의 실효적 지배를 주장하기 위한 물리적 근거 확보 전략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경계가 획정되지 않은 수역에서 국제 분쟁이 불거졌을 때 탐사·시추, 구조물 설치, 관측 기록 등 실효적 활동의 실적 데이터가 가장 먼저 제시된다는 점에서다.
중국의 이 같은 행위는 특히 시진핑 국가주석이 2012년 해양강국 건설을 선포한 뒤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잠정조치수역에 인공 구조물과 대형 부표(浮標) 등을 무단으로 설치하고 있다. 이를 두고 서해를 중국 내해로 만들어 영해를 확장하려는 ‘서해공정’의 일환이라는 우려가 크다.
한국이 비례 대응 원칙에 따라 서해 자원 개발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해 중부 해역 전반의 탐사·시추 활동 실적에서 중국과의 격차가 크게 벌어졌기 때문이다.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을 지낸 남성욱 숙명여대 석좌교수는 “구멍을 뚫었다는 건 어업 활동 외 행위로, 단순히 생물이나 지표를 조사하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며 “우리도 비례적 대응에 나서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중국은 동부 장쑤성 북부 연안 수베이 분지에서 이미 석유가스를 생산하고 있다. 조용채 서울대 에너지자원공학과 교수는 “중국이 석유를 생산하는 분지가 (우리 쪽 수역과) 얼마나 연결돼 있는지 등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데, 유망성 구조 자체를 판단할 수 있는 탐사 데이터가 너무 없다”고 말했다.
김병엽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에너지자원개발본부장은 “최근 중국이 기존 퇴적분지가 아니라 중앙융기대에서 시추(CSDP-2)를 통해 유망성을 확인했다는 논문이 발표됐다”며 “우리나라도 군산분지와 흑산분지 사이 해당 융기대 탐사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고 했다. 특히 중국 연구진이 유징(油徵·석유시스템)을 확인한 CSDP-2 시추공은 이보다 앞서 잠정조치수역에서 실시된 CSDP-1의 후속 시추공이다. 중국은 꾸준한 탐사시추를 통해 자원 개발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한국이 서해에서 단순 탐사 활동을 벌이는 것에도 방해를 일삼고 있다. 지난해 지질자원연구원이 출항시킨 서해 탐사선 탐해3호가 잠정조치수역 서쪽 부분을 탐사하자 중국 해경함 수 척이 탐사선 주변을 따라다니며 “해양 권익 침해 행위를 중단하라”며 위협을 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다른 해양 안보 전문가는 “잠정조치수역 합의는 협력보다는 충돌을 미루는 방식이었지만, 이후 중국은 장기 전략에 따라 일방적으로 실적 데이터를 축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이번 기회에 한국이 중국에 서해 공동개발 이니셔티브를 먼저 제안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