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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 영령의 숭고한 뜻 가슴에 새기고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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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은 호국 보훈의 달이다.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되는 시기다. 주니어 생글생글 기자들이 서울 동작동에 있는 국립서울현충원에 다녀왔다. 국립서울현충원은 1955년 7월 국군묘지로 창설됐다. 축구 경기장 200개 넓이인 143만㎡의 부지에 6·25 전쟁 전사자를 비롯해 베트남전 전사자, 독립 유공자 등 19만7000여 명이 잠들어 있다.

주니어 생글 기자들은 호국 영령에게 참배하고, 해설사의 설명을 들은 뒤 6·25전쟁 중 전사한 경찰관들이 묻힌 5번 묘역에서 비석을 닦고 청소했다. 여느 때와 달리 숙연한 분위기에서 취재가 이뤄졌다. 순국선열의 희생을 바탕으로 오늘날 우리는 자유와 번영, 평화를 누리고 있다. 이번 6월엔 국립서울현충원에 들러 나라를 위해 헌신한 분들의 뜻을 되새겨 보면 어떨까.'

by 유승호 기자
기자단 대표해 분향… 가슴 뭉클했어요

김지우 주니어 생글 기자
안양 범계초 4학년


국립서울현충원에 도착하자마자 드넓은 묘역과 비석 앞에 놓인 꽃들이 보였다. 참 아름다우면서도 슬퍼지는 풍경이었다.

현충탑 아래에서 조국을 위해 희생하신 분들께 참배하고 묵념했다. 나는 주니어 생글생글 기자단 대표로서 앞에 나가 향을 피우고, 참배를 마치고 나와서 방명록을 작성했다. 글을 쓰면서 가슴이 뭉클해졌다.

위패봉안관에 가서 또 한 번 묵념했다.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당일 날짜에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 묵념을 올린다고 한다. 우리가 방문한 5월 23일에 돌아가신 분들의 이름이 적힌 책자가 있었다. 이 시간을 오래 기억하고 싶었다.

국립서울현충원에는 19만7000여 명의 전사자가 잠들어 있다.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이 그렇게 많은지 몰랐다. 나도 나라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마지막으로 5번 묘역에 가서 묘비를 닦고 주변에 떨어진 쓰레기도 주웠다. 나라를 지킨 분들의 묘비를 닦아 드리니 마음이 뿌듯해졌다.

이름 모를 용사들이 우리나라 지켰어요

서동화 주니어 생글 기자
양주 광사초 3학년


국립서울현충원에 다녀왔다. 현충문으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현충탑이 보인다. 현충탑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군인과 독립운동가들을 기리는 의미 있는 탑이다. 높이는 31m이며, 1967년에 세워졌다.

현충탑 아래 지하에는 위패봉안관이 있다. 6·25전쟁 후에 유해를 찾지 못한 사람들의 이름을 위패에 적어 보관하고 있는 곳이다. 그 수가 무려 10만3000명이나 된다.

무명용사들이 잠든 곳도 있다. 무명용사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용사들이다. 전쟁 중에 온전한 시신을 찾지 못하고 나중에 뼛조각이 발견되면 이름을 확인할 수가 없다. 무명용사 봉안관에는 5800여 명의 용사가 잠들어 있다.

마지막으로 5번 묘역으로 가서 비석을 닦았다. 1950~1970년 대에 돌아가신 분이 많았다. 먼지를 깨끗이 닦아 내고 싶었는데 잘 닦이지 않는 얼룩도 있어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이 그렇게나 많다는 점에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호국 보훈의 가치 깨달은 뜻깊은 경험

정세아 주니어 생글 기자
시흥가온초 4학년


주니어 생글 기자로서 처음으로 취재를 다녀왔습니다. 취재 장소는 국립서울현충원이었습니다. 먼저 현충탑 앞에서 묵념하며 감사한 마음을 전했습니다.

현충탑 아래에는 위패봉안관이 있었는데, 검은색 판에 깨알같이 많은 글자가 적혀 있었습니다. 위패봉안관에서 나와 무명용사 봉안관으로 갔습니다. 커다란 구덩이 위에 유리판이 덮여 있었고, 그 안쪽에 있는 항아리에 무명용사들의 유골이 들어 있었습니다. 국립서울현충원에는 전직 대통령들도 묻혀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비석을 닦고 청소하는 봉사 활동을 했습니다. 우리가 맡은 곳은 5번 묘역이었습니다. 이곳은 경찰관들이 잠들어 있는 곳입니다. 아빠가 경찰관이어서 더 의미 있게 느껴졌습니다. 수건을 하나씩 받아서 비석을 닦았습니다. 시간이 좀 지나니 팔이 아팠습니다. 하지만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을 생각하며 열심히 닦았습니다. 우리나라를 지켜 주신 분들에 대해 감사함을 느낄 수 있는 뜻깊은 취재였습니다.


호국 용사의 묘비 빛나도록 닦았어요

이유니 주니어 생글 기자
과천 문원초 6학년


국립서울현충원의 정문인 현충문 앞에 도착하자 왠지 모르게 뭉클한 느낌이 들었다. 현충탑 앞에서 참배할 때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한편으로는 분노가 느껴지기도 했다. 6·25전쟁으로 인해 3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현충탑 아래에 있는 입구로 들어가자 벽에 수많은 이름이 적힌 판이 보였다. 유해를 찾지 못한 6·25전쟁 참전 용사들의 위패였다. 자기 목숨까지 바쳐 나라를 지켜 주신 분들께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이번에 가 보지는 못했지만, 부지가 좁아 안장하지 못한 분들을 위한 봉안당(납골당)도 있다고 한다. 얼마나 많은 분이 전쟁 중에 희생되었기에 안장할 땅이 모자랄 정도일까….

6·25전쟁 때 전사한 경찰관들의 비석을 닦으며 적힌 글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어느 비석 앞에는 전사자의 어머니가 “장하다 내 아들”이라고 쓴 패가 놓여 있었다. 가슴이 뭉클해져서 그 패를 빛이 나도록 닦았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위해 많은 분이 희생하셨다. 조국을 위해 모든 걸 바친 분들의 정신을 되새기며 취재를 마쳤다.


북한 탈출해 돌아온 조창호 중위
이도연 주니어 생글 기자
서울오금초 5학년


여러분은 1950년에 일어난 6·25전쟁을 알고 있나요? 군인, 경찰관 등 수많은 사람이 전쟁 중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분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호국 정신을 되새기기 위해 현충원에 다녀왔습니다. 본격적인 취재에 앞서 호국 영령들께 분향하고 묵념했습니다.

현충탑 아래에는 위패봉안관이 있었습니다. 6·25전쟁 중 전사하신 분들의 이름과 계급이 적혀 있었습니다. 위패 중간중간 이름이 빠진 것도 볼 수 있었습니다. 전사하신 분의 유해를 찾으면 다른 곳에 모시고 위패에서 이름을 뺀다고 합니다.

전사한 줄 알았던 사람이 살아 돌아와 위패에서 이름을 뺀 사례도 있습니다. 1994년 우리나라로 돌아온 조창호 중위가 첫 번째 사례였습니다. 조창호 중위는 6·25전쟁 중 전사자로 처리됐지만, 실제로는 북한군에 포로로 끌려가 40년 동안 탄광 등에서 강제로 노동하다가 북한에서 탈출해 우리나라로 돌아왔습니다.

경찰관 묘역의 묘비를 닦으며 이분들이 없었다면 우리가 자랑스러운 한국인으로 살아가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현충일이 더 큰 의미가 있는 날로 느껴졌습니다.

오늘의 신문 - 2025.06.0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