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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크 플로이드 앨범 속 네 개의 기둥...몰락의 상징에서 럭셔리 부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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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섭의 음미(美)하다]

핑크 플로이드 앨범 재킷 속 장소,
英 런던 배터시 발전소를 가다

생산성 약화로 쇠락의 길 걸었으나
애플 등의 글로벌 기업과
신흥 부유층 유입으로 부촌으로 번성해

"영국의 짐승들, 아일랜드의 짐승들, 모든 땅과 기후의 짐승들,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황금빛 미래의 시간."
- 조지오웰 <동물농장> 中에서

1977년 영국 출신 밴드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는 실험적인 앨범 <Animals>를 공개한다. 당시 영국은 저효율, 고비용의 산업구조와 노동당의 과도한 국유화 정책으로 인해 IMF로부터 구제 금융을 받은 직후였다. 산업혁명 이후 20세기 초반까지 강력한 제조업과 군사력을 기반으로 세계적인 영향력을 끼쳤던 영국이 ‘유럽의 환자’로 전락한 것이다.

밴드의 멤버인 로저 워터스(Roger Waters)는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소설 <동물농장>에서 영감을 받아 몰락하는 영국의 정치, 경제, 사회 상황을 비판하는 콘셉트 앨범을 구상했는데, 그것이 바로 핑크 플로이드의 10번째 정규 앨범 <Animals>다.



앨범 자켓을 보면, 하늘로 치솟은 네 개의 발전소 굴뚝이 흑색 연기를 내뿜고 있고, 검은 하늘을 둥둥 떠다니는 돼지 한 마리가 강렬한 인상을 준다. 디자인 스튜디오 힙노시스 (Hipgnosis)의 작품인데 마치 1970년대까지 일궈온 영국식 산업발전과 사회주의적 자본주의에 종말을 선고하는 메타포 같다. 이 앨범에 등장하는 발전소가 바로 런던 뱅크사이드에 위치한 배터시 발전소(Battersea Power Station)다.



‘산업의 성전’에서 ‘자본의 체스판’으로

배터시 발전소는 1920~1930년대 걸쳐 건설된 대규모 석탄 화력 발전소였다. 런던전력회사(LPC) 수석 엔지니어인 레오너드 피어스(Leonard Pearce)의 지휘 하에 자일스 길버트 스콧(Giles Gilbert Scott)과 J. 테오 할리데이가 건축의 설계와 디자인을 맡았다. 런던의 빨간 공중전화 부스를 디자인한 세기의 디자이너 길버트 스콧은 배터시 발전소가 건축사적으로도 의미 있길 바랐다.

배터시 발전소는 A-B 두 개의 발전소가 시간 차를 두고 따로 건설되어 하나의 건물로 묶인 형태다. 약 600만개 벽돌과 세인트 폴 성당이 들어갈 정도의 거대한 크기인 메인 보일러 하우스, 그리고 우뚝 솟은 4개의 굴뚝 등으로 이뤄진 배터시 발전소는 완공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벽돌식 건물이었다. 특히 아르데코 양식의 내부 공간과 장식으로 유명했는데, 1955년 완공 이후 런던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았고 버킹엄궁전, 웨스트민스터 등을 포함해 런던 시내 대부분에 전력을 공급하게 된다. 주님의 성전이 세인트 폴 성당이라면, 산업의 성전이 바로 배터시 발전소인 셈이다. 약 20년간 런던의 전력을 담당하던 배터시 발전소는 생산성의 감소와 운영비 증가 등으로 인해 1975년 발전소 중 일부인 A발전소가 가동을 멈추고, 이어 1983년에는 B발전소가 가동을 멈췄다. 영국 산업 부흥의 상징이 쇠락의 상징으로 탈바꿈한 순간이었다.



2014년까지만 해도 거의 폐허에 가깝게 방치되었던 배터시 발전소는 이후 거대자본이 들어와 현재에도 발전소 부지를 포함한 주변 지역이 함께 재개발 중이다. 약 90억 파운드(약 16조) 이상의 예산이 투여되는 배터시 발전소 마스터플랜은 총 7단계(8구역)로 나뉘어 진행되는데, 현재 공장 본체와 주거지역, 생활시설 등 3단계까지 마친 상태다.



1단계에 해당하는 배터시 발전소와 기찻길 사이에 길게 놓인 지역은 통유리 건축물 패러데이 하우스(Faraday House, Battersea Power Station)가 들어섰다. 런던을 근거지로 한 세계적인 건축 스튜디오 '디알엠엠(dRMM)'과 '심슨하우 앤 파트너스(SimpsonHaugh and Partners)'가 함께 설계한 이 공간은 최고급 주거 공간과 사무실이 자리 잡아 템스강과 첼시 그리고 배터시 발전소 뷰를 동시에 경험할 수 있게 설계됐다.

2단계 배터시 발전소 본체의 리노베이션은 '윌킨스에어(WilkinsonEyre)'가 맡았다. 전체적인 외관을 손상하지 않으면서 동시대적 감각을 극대화하기 위해 길버트 스콧이 디자인했던 흔적과 건축 자재의 다양한 구성 요소를 효과적으로 조직하는 방식, 울타리의 기하학적 배열에 대한 깊은 연구와 고찰이 선행됐다. 발전소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벽돌과 굴뚝을 재건하기 위해 많은 실험과 시행착오를 거쳐 재건에 성공한다. 발전소 안에는 현재 애플 런던 캠퍼스 등을 포함한 글로벌 기업들이 자리 잡고 있고, 고든 램지의 브래드스트리트 같은 런던 유명 레스토랑도 입점해 있다. 런던을 360도 파노라믹 뷰로 감상할 수 있는 Lift 109는 비싼 입장료임에도 예매 전쟁을 치러야 한다. 이제 이곳은 사람과 자본을 질료로 새로운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다.




서커스 로드를 따라 복잡다단한 나선 형태의 건축물이 뱅크사이드까지 이어지는데, 루이비통 재단의 건축가로 알려진 프랭크 게리와 독일 국가의회 의사당을 건축한 노먼 포스터가 손잡고 만든 이곳은 프로스펙트 플레이스(Prospect Place)라는 공간이다. 마스터플랜 3단계에 해당하는 이 지역은 페러데이 하우스보다 더 상위급 주거시설과 세계적인 부동산 기업 등이 입주해있다.



신흥 부유촌으로 급부상한 배터시 발전소

배터시 발전소의 마스터플랜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1970년대까지 런던 산업의 성전이었던 이곳이 이제는 자본의 체스판으로 변했다. 주재원으로 이곳에 살고있는 친구에게 물으니, 최근 아시아 지역의 젊은 부부와 신흥 부자층이 동네에 많이 유입됐다고 한다. 런던 주재 미국 대사관, 템스강, 신축 고급 빌라가 주변에 있다는 이점도 있어 인플루언서들이 많이 방문하고, 애플 런던 캠퍼스에 근무하는 직장인도 많이 거주한다고도 했다. 주거지역의 월세도 약 800만원부터 5000만원까지 조망권과 층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한때 폐허였던 이 터전의 황금빛 미래의 시간은 더 비싸고 더 럭셔리어스한 미래를 제시할 것만 같았다.

런던의 맑은 날은 많이 낯설다. 대서양 해양성 기후지대인 런던은 비가 오고 흐려 그 속의 우울함을 예술적으로 승화할 때 맛이 난다. 지금의 배터시 발전소는 그저 쨍한 햇살이 비추는 런던 같았다.



런던=이진섭 칼럼니스트•아르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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