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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사도 스타킹만 신었다"…명품들 '하의실종'에 꽂힌 이유 [안혜원의 명품의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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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원의 명품의세계] 85회

명품은 '왜' 팬츠리스 패션을 런웨이서 선보일까

“너무 많은 참석자가 바지를 집에 두고 왔다. 올해 멧갈라는 바지 벗은 패션을 기념하는 자리인가.”

미국 패션매거진 'W'는 지난 5일(현지시각) 열린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열린 ‘2025 멧 갈라’ 주요 패션 스타일을 조명하며 이 같이 총평했다. 멧 갈라는 1948년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의 의상 연구소(코스튬 인스티튜트)가 연간 전시 기금 모금을 위해 시작한 자선 행사다. 패션 매거진 '보그'가 함께 주최하면서 매해 색다른 주제를 내세운다. 글로벌 유명 인사를 초청하는 미국 패션계 최대 행사로 꼽히는데, 특정한 의상 테마를 선정해 열기 때문에 세계적 디자이너들의 옷을 입은 유명인들의 독특하고 화려한 패션을 즐길 수 있다.

이번 멧 갈라 주제는 ‘수퍼파인: 테일러링 블랙 스타일(Superfine: Tailoring Black Style)’로, 섬세하면서도 완벽하게 재단된 검정 의상을 뜻한다. 국내 아이돌 블랙핑크 멤버들도 화려한 의상을 선보이며 많은 관심을 받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이슈몰이를 한 건 리사의 패션이었다. 루이비통 글로벌 앰버서더이자 올해 처음 멧 갈라 무대에 선 리사는 루이비통 시스루 재킷과 루이비통의 독특한 모노그램 장식이 새겨진 스타킹만 착용한 ‘하의 실종’(팬츠리스) 패션에 과감하게 도전했다.

해외 패션계는 일제히 리사의 팬츠리스 패션을 조명했다. 올해 멧 갈라에서 이 하의실종 패션을 주도한 건 루이비통의 남성복 아트 디렉터 퍼렐 윌리엄스다. 세계적 팝스타에서 명품 브랜드 디자이너로 전향한 그는 올해 멧 갈라의 공동 의장 중 한 명이다. 그가 몸 담은 브랜드 루이비통이 이 행사를 후원하면서 대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윌리엄스는 여러 참석자들 의상을 담당했다. 이 독특하고도 한편으론 기이한 패션을 두고 한 글로벌 패션 전문지에선 “일이 많은 윌리엄스가 어쩌면 바지를 모두 벗어던지는 것으로 시간을 절약한 것일지도 모른다”며 우스갯소리에 가까운 논평을 내놓기도 했다.

이유가 무엇이든 윌리엄스가 올해 팬츠리스 패션에 단단히 꽂힌 것은 틀림없다. 심지어 그의 아내 헬렌 랜시찬조차 상의로 검은색 가죽 자켓에 보디수트를 입었지만, 하의는 입지 않고 루이비통 브랜드 스타킹만 입은 채로 행사에 나타났다.

이날 하의실종 패션에 도전한 브랜드는 루이비통뿐만이 아니다. 루이비통이 이 트렌드를 가장 크게 홍보한 기업 중 하나이긴 하지만, 마크 제이콥스도 미국 래퍼 도자 캣에게 호피 무늬가 돋보이는 바디수트만 입혔다. 영화배우 타라지 P. 헨슨도 미국 럭셔리 브랜드 몬세의 맞춤 드레스를 입었는데 길이가 너무 짧아 마치 턱시도 상의만 입은 것처럼 보였다. 가수 저스틴 비버의 아내 헤일리 비버도 생 로랑의 블레이저만 착용한 채 나타났다.

이처럼 명품 브랜드들이 팬츠리스 트렌드를 시도한 것은 최근 일만은 아니다. 이미 2021년 멧 갈라에서 배우 조이 크라비츠는 실버색 속옷 위에 생로랑의 시스루 실버 드레스를 입어 하의 실종 패션의 서막을 알렸다. 이듬해 글로벌 인플루언서 카일리 제너는 파리 패션쇼에서 속옷에 가까운 로에베 팬츠만 입고 맨 앞줄에 앉아 쇼를 즐겼으며 영화배우 줄리아 폭스는 속옷 차림으로 마트 쇼핑을 해 화제를 모았다.

미우미우는 2023년 속옷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을 만큼 짧은 데님 팬츠나 가죽 반바지만 입은 모델들로 런웨이를 꾸몄으며, 데일리룩으로 입을 수 있는 크리스털 팬츠리스 패션을 선보이기도 했다. 알렉산더 왕의 2025년 봄 RTW, 루이비통의 2025년 봄 컬렉션도 비슷한 양상이다.

패션계에서는 이미 명품 런웨이에서 바지가 사라지는 과정이 점진적으로 진행돼 왔다고 분석한다. 앞서 통상 자전거를 탈 때 입는 짧은 '쫄바지'인 바이크 쇼츠 붐이 있었다. 펜데믹 동안 잠시 스웨트 팬츠(발목에 밴드가 있는 운동복 스타일)가 각광 받았지만, 코로나19가 종식되고 다시 외출하기 시작하면서 짧은 플리츠 스커트와 마이크로 미니가 유행했다.

'저항'의 관점에서 팬츠리스 패션을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최근 멧 갈라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의상 자율성을 주장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과거 여성이 바지를 입는 것이 남성 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진 것처럼 바지를 벗어던지는 것 또한 오래된 관습에 대한 저항의 의미를 담은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얘기다.

최근 와이드한 스타일의 바지가 크게 유행하면서 반작용으로 팬츠리스 패션이 부각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편한 옷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지면서 몸에 달라붙는 스키니 팬츠의 유행이 지고 풍성하고 넉넉한 형태의 바지가 각광받고 있다. 브랜드들이 실루엣을 묘사하기 위해 풍선 이나 낙하산 같은 단어를 사용할 정도로 오버사이즈 바지가 대세다. 그러자 샤넬, 루이비통, 프라다 등 유행을 선도하는 명품 브랜드들이 의도적으로 바지를 반쯤 벗은 듯한 패션을 런웨이에 내세우고 있다는 설명이다.

안혜원 한경닷컴 기자 anh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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