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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의 림버링은 봄의 나른함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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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이단비의 발레의 열두 달

발레의 기지개, 림버링(limbering)

일 년 중 단 열흘 간의 화려한 공연을 마치고 벚꽃이 다시 나무줄기 사이로 몸을 감췄다. 이제 완연한 봄이 찾아왔다. 봄의 아지랑이는 마치 19세기 낭만발레에서 보이는 몽환적인 환상의 이미지와 닮았다. 봄날의 나른하고 포근한 날씨와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봄이 되면 누구든 봄볕 아래 꾸벅꾸벅 졸게 된다. 이탈리아 작곡가 안토니오 비발디(Antonio Vivaldi, 1678~1741)가 1725년 작곡한 <사계> 중 '봄' 2악장에는 나른한 봄볕에 양치기가 졸고 있는 모습이 담겨 있다. 라르고로 연주되는 바이올린의 선율은 춘곤증이 밀려오는 날의 전경을 귀로 들려주는 것이다.

늘어진다는 것은 춤을 추는 사람들에게 팽팽하게 당기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 근육을 충분히 늘려주는 과정이 부상의 위험을 줄여주고 더 확장되고 자유로운 움직임을 가능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발레에서는 유연함이 팽팽함을 가능하게 만들고, 늘어지는 것이 바짝 호흡을 위로 올리는 토대가 된다. 종일 책상에 앉아서 어깨를 긴장한 채 컴퓨터와 의자와 한 몸이 되어 일하는 직장인들에게도 몸을 늘려줄 시간은 중요하다. 기지개를 켜는 건 앞의 시간을 끊고 공기를 바꿔서 다음 시간을 만나는 일이다. 발레에도 기지개가 있다. 림버링(limbering)이다. 발레 클래스는 바(bar)를 이용한 바 워크와 바를 치우고 센터에서 다양한 동작을 연습하는 센터 워크로 구성돼 있다. 바 워크를 마친 후 몸을 최대한 늘려 유연하게 만드는 과정을 발레에서는 림버링이라고 부른다. 림버링은 공연이나 본격적인 리허설과 센터 워크에 앞서서 몸을 준비시키는 과정이다.





림버(limber)는 나긋나긋하고 유연하다는 뜻을 갖고 있으므로 림버링은 스트레칭과 비슷한 말이다. 스트레칭은 매트나 다양한 기구를 활용하거나 맨몸으로 하는데 발레에서 바를 이용해서 스트레칭할 경우 보통 림버링이라고 부른다. 림버링의 모습이 발레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이미지로 종종 등장하는 건 바와 한 몸이 되어 움직이는 모습이나 포즈가 아름답기 때문이다. 바는 그만큼 발레에서 기능적으로도 미적으로도 훌륭한 도구가 되고 있다.



발레에서 바가 등장하는 것은 17세기 프랑스에서였다. 17세기에 루이 14세가 발레무용수를 양성하기 위한 아카데미를 설립했고, 이를 기반으로 18세기에는 전문무용수 시대가 열리면서 다양한 훈련법과 훈련기구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초창기의 발레 바는 벽에 붙은 나무 난간의 형태였지만 점차 소재와 모양, 크기가 달라졌고, 오늘날에는 금속도 사용되고 이동식, 조립형, 개인용 바 등 다양한 바가 만들어지고 있다. 바 훈련의 중요성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커졌다. 근육을 만들고, 코어를 잡고, 균형감을 키우는 데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발레의 바 워크는 춤을 위한 몸의 기틀과 발레 동작의 기본을 다지는 핵심적인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클래스를 하면 할수록 이렇게 과학적이고 세심한 훈련법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하나하나가 주옥같다. 바 워크는 발레를 하는 사람들에게 생명수나 다름없다. 이제는 바는 훈련 도구를 넘어서서 작품에서도 발레 바는 주요 오브제로 활용되기도 하고, 바 워크를 확장한 움직임은 훈련법 그 이상으로서 작품으로도 가치를 지니고 있다. 바를 이용한 한 림버링 역시 그렇다.



얼마 전, 서울문화재단에서 준비한 <우리가 궁금했던 예술-춤추는 예술의 세계>라는 제목으로 김용걸, 김보람 두 안무가와 함께 토크 강연을 진행한 적이 있었다. 두 안무가 모두 매일 바를 통해 몸을 다지고 있을 정도로 바의 중요성과 매력에 빠져있었다. 한 번 그 맛에 들이면 거기서 헤어 나올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바맛'이라고 부르며 웃었다. '바맛'에는 림버링도 포함된다. 마침 토크 첫날에 김용걸 안무가는 관객 입장 50분 전부터 직접 바 워크와 림버링을 하면서 무용수답게 관객을 맞이했다. 그는 바를 하면서 안무에 대한 영감을 얻기도 하고, 바에서 균형을 잡듯이 바를 하는 동안 생각하고 배우는 것들로 삶의 균형을 잡아가기도 한다는 점을 이야기했다. 바 워크와 림버링은 삶의 균형을, 여유를 권고한다.



림버링은 봄의 나른함을 닮았다. 봄이 되면 봄날의 고양이들처럼 좋아하는 책이나 문장 사이에 파묻혀 뒹굴기를 즐긴다. 한정원 작가의 <시와 산책>에서 봄을 닮은 몇 가지 문장을 다시 읽으며 4월이 깊어가고 5월이 찾아오는 시간을 걷고 있다.

"꽃잎을 밟지 않으려고 나는 이쪽으로 저쪽으로, 보폭을 넓혔다가 좁혔다가 하며 걷는다. 걸음이라기보다 춤출 때의 발동작처럼 보인다. 두 팔까지 높이 들려 이리저리 움직인다. 얼굴을 들고 밥을 먹던 고양이들이 쩝쩝거리며 나를 쳐다본다. ‘왜 그래?’라고 묻는 것 같다.
물도 마셔. 내일 봐.
울타리까지 가는 동안, 나는 춤을 춘다."


춤이, 리듬이, 꽃의 음악이 느껴지는 문장이라 친구와 몇 번을 같이 읽으며 좋아라 했다. 그러다가 이미 구경할 틈도 없이 우수수 떨어진 꽃잎 사이를 내 귀에만 들리는 음악에 맞춰 걸어보기로 한다. 이미 떨어진 벚꽃이라도 그 여린 꽃잎이 망가질세라 그 사이를 이리저리 피하며 걸어본다. 혹은 레드카펫을 밟는 배우처럼 꽃잎이 가득 떨어진 옆자리를 우아하게 지나가 보기도 한다. 바 대신 꽃잎들이 나의 몸을, 그리고 마음을 유연하게 늘려주는 것을 느꼈다. 꽃잎 사이로 마음이 림버링되었다. 지나가는 4월의 공기 안에서 길게, 깊게, 크게, 넓게 기지개를 켰다.

이단비 작가•<발레, 무도에의 권유> 저자

오늘의 신문 - 2025.05.01(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