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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사장이 성희롱 가해자 변호사?···AICC 기업의 이상한 '사내 변호사 제도' [강홍민의 끝까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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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3월 경력직 입사한 ㄱ씨, 입사 2주 만에 직속 임원에 직장 내 괴롭힘 당해
회사측, 가해자·피해자 분리조치 소홀
인사위, 하루 전 상사를 변호인으로 선임하는 ‘사내 변호사 제도’ 신설
차연수 노무사 “‘사내 변호사 제도’, 직괴 피해자 비밀 유지 위반 소지 있어”



국내 굴지의 AICC(인공지능컨텍트센터) 아웃소싱 기업에서 직장 내 괴롭힘 및 성희롱 사건이 발생한 가운데, 사측의 대응을 두고 논란이다.

이 기업은 직장 내 괴롭힘 신고 이후 사건 당사자인 가해자와 피해자 간의 분리조치를 제대로 하지 않고, ‘사내 변호사 제도’ 등을 신설·도입해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를 발생시킨 것 아니냐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지난해 3월, ㅇ회사에 경력직으로 입사한 ㄱ씨는 입사 2주 만에 소속부서의 임원 ㄴ씨로부터 성추행 및 성희롱을 당했다. ㄴ씨는 자신의 개인적인 성 욕구, 부부관계 등의 속사정을 털어놓거나 손을 만지는 등의 행위로 ㄱ씨를 괴롭혔다.

작년 10월 ㄱ씨는 사내 직장 내 괴롭힘 및 성희롱으로 ㄴ씨를 신고했다. 이듬해인 올 3월 회사는 ㄱ씨가 신고한 내용으로 인사위원회를 열었다.

이 과정에서 ㄱ씨는 사측이 직장 내 괴롭힘 사건의 절차를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ㄱ씨는 직장 내 성희롱과 괴롭힘을 당한 시점에 타 팀으로 발령을 받았고, 근무지도 타사업장으로 이동했다. 사측은 이를 통해 이미 물리적 분리조치가 이뤄졌다며 가해자에 별도의 업무배제나 자택 대기 등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하지만 작년 12월에 이어 올 3월에도 가해자인 ㄴ씨는 ㄱ씨가 근무하는 사업장에 예고 없이 찾아왔다.

ㄱ씨는 “외근을 마치고 회사로 복귀했는데 가해자가 제가 근무하는 곳에 왔다는 연락을 상사로부터 받았다”며 “그 이야기를 듣고 한참 동안 가해자가 갈 때까지 주차장에서 기다려야만 했다”고 말했다.

ㄱ씨는 이 같은 내용을 사측 인사팀에 알렸다. 하지만 인사팀은 가해자에게 연락을 시도했으나 연락이 되지 않는다며 ㄱ씨에게 재택근무를 안내했다.

이에 ㄱ씨는 “가해자가 뻔히 제가 일하고 있는 걸 알면서 이곳에 온 걸 보면 분리조치에 대한 제대로 된 안내가 없었던 것 아니냐”면서 “피해자가 왜 가해자를 피해 다니면서 불이익을 봐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또한 사측은 지난 3월 ‘사내 변호사 제도’를 신설, ㄱ씨가 신고한 사건부터 도입했다.

‘사내 변호사 제도’는 사건 당사자인 피해자·피의자를 대상으로 적극적인 소명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것으로, 사건 당사자의 상위 직무자가 ‘사내 변호인’으로 인사위에 참석해 소명하는 방식이다.

해당 사건의 가해자는 임원으로, ㄴ씨가 선임한 사내변호사는 부사장 직책인 ㄷ씨인 것으로 알려졌다.

ㄱ씨는 “이런 제도가 있다는 것도 인사위원회 전날 사측으로부터 통보 받았다”면서 “부사장님이 가해자를 변호한다면 저를 변호해 줄 상사가 있겠나. 이 제도가 과연 직장 내 괴롭힘 피해자를 위한 것인지, 회사는 사건을 제대로 해결할 의지가 있는 건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이 같은 ‘사내 변호사 제도’는 공기업을 포함한 민간기업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제도다. 일각에서는 직장 내 괴롭힘 사건의 당사자인 피해자를 보호하는 제도가 아닌 가해자를 감싸는 제도 아니냐는 지적이다.

실제 고용노동부 직장 내 괴롭힘 담당 사무관 역시 ‘사내 변호사 제도’에 대해 생소하다는 입장이다.

사무관 ㅅ씨는 “직장 내 괴롭힘 사건의 경우 사건 내용을 피해자의 의사에 반해 공개할 수는 없게 돼 있다”면서 “피해자가 동의하지 않았는데 사건의 구체적인 경위 등의 내용은 보고체계에 있는 사람들한테만 공개해야 한다. 이유는 직장 내 괴롭힘 사건의 요점은 피해 근로자의 의사가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사측에서 사건의 경위를 파악하기 위해 당사자 외 임직원을 참고인으로 조사는 가능하지만 공개적으로 변론을 도와주는 사람을 변호인으로 지칭해 개입시키는 건 익숙하지 않다”며 “회사가 왜 이런 제도를 도입했는지 구체적인 도입 취지는 모르겠으나 민간기업에서의 사례로는 처음 들어 본다”라고 밝혔다.

차연수 노무법인 광화문 대표 노무사는 “보통 직장 내 괴롭힘 사건이 발생하면 사내 변호사나 외부 변호사를 지정해 법률상담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경우는 있으나 임직원 중 한 명을 선택해 피해자 또는 가해자를 변호하게 하는 이 제도는 처음 들어 본다”라고 말했다.

이어 “직장 내 괴롭힘 사건의 경우 비밀 유지 의무가 있는데, 만약 피해자 또는 가해자가 변호인을 정하는 과정에서 사건 내용이 다른 사람에게 공유되는 걸 원치 않을 수도 있다”면서 “민간회사에서 정한 규정이지만 일반적이지 않아 보인다”고 말했다.

더불어 “임원의 경우, 사건에 대해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보고를 받을 위치이지, 가해자 또는 피해자를 변호한다는 것은 사건이 한쪽으로 기울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ㄴ씨는 지난달 열린 인사위원회에서 ‘견책(시말서)’ 수준의 징계를 받았고, 현재 ㅇ기업에서 퇴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강홍민 기자 kh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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