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뱀만큼 다양한 문화와 역사 속에서 다면적인 의미를 지닌 동물도 없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뱀은 아담과 이브를 유혹하는 악한 존재로 여겨지지만, 성장하는 몸에 맞는 비늘을 위해 허물을 벗으며 재탄생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작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또, 뱀의 독이 누군가를 해칠 수도 있지만, 약으로 이용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의학과 약학의 상징인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에 등장해 치유와 생명의 의미를 동시에 지닌다.
불가리는 1948년 라틴어로 뱀을 의미하는 세르펜티(Serpenti)라 이름 붙인 컬렉션을 처음으로 선보였다. 뱀이 손목을 감싸는 형상의 주얼리 워치를 통해서다. 이를 시작으로 불가리는 오랜 시간 뱀의 상징적인 이미지를 브랜드의 다양한 여정에 적용해 왔다.

이 여정에 아티스트들이 동참하게 된 것은 2023년, 불가리 세르펜티 컬렉션 75주년을 맞이하면서부터다. 지속해서 작품에 뱀을 등장시키며 자신의 삶을 녹여낸 화가 천경자와 밝은 색채를 통해 생명력 넘치는 뱀을 표현한 프랑스의 여성 작가 니키 드 생팔(Niki de Saint Phalle)을 비롯, 6명의 여성 작가 작품을 국제갤러리에서 선보인 <불가리 세르펜티 75주년, 그 끝없는 이야기>를 통해 세르펜티의 헤리티지와 예술을 연결한 전시를 선보인 바 있다.
푸른 뱀의 해를 맞이한 2025년 1월, 중국 상하이의 역사적인 공간 장위안에서 열린 문화적 교류의 장 <세르펜티 인피니토(Serpenti Infinito)> 전시가 지난 3월 28일, 한옥이 즐비한 서울 북촌의 푸투라로 무대를 옮겨왔다.

11명의 아티스트가 재해석한 세르펜티
‘탄생(REBIRTH)’, ‘변화(TRANSFORM)’, ‘진화(EVOLUTION)’의 세 가지 키워드를 주제로 구성한 두 번째 <세르펜티 인피니토> 전시는 브랜드의 상징적인 아이콘 세르펜티에서 영감받은 11인의 아티스트 작품과 불가리 세르펜티의 헤리티지를 경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려졌다.
이번 전시는 세 가지 주제를 각자의 스타일로 풀어낸 아티스트들의 참여가 돋보인다. 터키 출신의 세계적 미디어 아티스트 레픽 아나돌(Refik Anadol)부터 지난해 프리즈 서울 아티스트 어워드 수상자 최고은, 배우이자 작가 하정우, 2024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전시 작가 최정화, ‘집 짓는 미술가’로 알려진 서도호 등 11명의 아티스트가 한데 모여 변화무쌍한 아이콘인 뱀을 주제로 한 작품 15점을 선보인다. 이중 이지연, 최고은, 최정화, 조기석, 박혜인, 김옥, 하정우 작가는 전시를 위해 7점의 작품을 새로 제작했다.


데이터와 AI를 활용해 몰입형 미디어 아트를 선보이는 레픽 아나돌의 신작 ‘인피니토: AI 데이터 스컬프처(Infinito: AI Data Sculpture)’는 이번 전시 하이라이트로 손색 없다. 네 면의 벽과 천장, 바닥 모두 거울로 둘러싸인 공간으로 입장하면 방의 한 가운데에서 뱀의 움직임처럼 유려한 동작을 뽐내는 작품과 마주하게 된다. 360도 거울로 에워싸여 모든 면에 작품이 반사되는 모습은 마치 작품이 끝없이 이어지는 모습을 연출한다. 감상할수록 몰입감을 더하는 이 작품은 불가리의 전 컬렉션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 AI에 입력시켜 완성했다.
스러져 가는 것들에서 찾은 영원한 순환
최고은 작가는 불가리와 특별한 인연을 공유한다. 2023년부터 2년 연속 불가리가 후원한 ‘프리즈 아티스트 어워드의’ 2024년 수상자로 선정됐기 때문. 게다가 파이프나 배기관 등의 재료를 활용해 작품을 만든다는 점은 불가리가 선보인 투보가스 세르펜티 주얼리 워치와도 그 뿌리를 같이 한다. 손목에 착 감기는 탄력 있고 형태의 투보가스 라인은 유연한 튜브로 감싸진 산업용 가스관에서 착안한 것으로 유명하다.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산업 소재를 활용해 작품을 만드는 최고은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금속 파이프를 절개하고 펼쳐낸 작품 ‘글로리아(Gloria)’를 선보인다. 작가는 버려진 냉장고나 에어컨 등의 가전제품을 절단하거나 분해해 모든 것이 쉽게 허물어지고 쉽게 지어지는 도시의 모습을 투영해 왔다. 이번 작품을 통해서는 도시 곳곳에 혈관처럼 분포해 있는 파이프를 통해 현대 사회에서 도시의 삶을 지탱하는 숨겨진 흐름을 보여주고자 했다.

전시장 옥상에 자리 잡은 최정화 작가의 ‘네이처 너처(NaTuRE NurturE)’는 거대한 돌덩어리를 쌓아 올린 모습이다. 깊은 산 속 사찰 근처에서 볼법한 소박한 돌탑을 닮았다. 작은 돌 하나를 쓰러지지 않게 올려두고 소원을 비는 돌탑. 하지만 그 크기와 아슬아슬한 모양새는 비교 불가다. 탑을 쌓은 재료도 다르다. 영락없이 화강암같은 이 돌덩어리는 바로 스티로폼. 작가는 전라남도 화순의 해변가에서 모은 풍화된 스티로폼의 한 가운데 철심을 박아 차곡차곡 쌓았다.
2023 광주시립미술관 생태미술 프로젝트, 2024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특별전 등을 통해 작품을 선보여온 작가는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벼룩시장에서 수집한 가죽이나 폐품, 찌그러진 그릇이나 플라스틱 등을 활용한 작업을 지속해 왔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고대 그리스어에서 파생된 상징 ‘우로보로스(Ouroboros)’를 주제로 무형과 유형의 작품을 풀어낸다. 꼬리를 집어삼키는 용 혹은 뱀의 형상을 한 우로보로스는 자신을 먹어 치우는 동시에 재생하는 모습으로 끝없는 순환을 의미한다. 그는 인공물과 자연을 혼합한 자신의 작품을 ‘제2의 자연’으로 바라본다. 버려진 것들을 다시 모아 생명을 부여하고, 자연과 대립되는 인공물을 또 다른 자연으로 바라보는 것이 그가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한 우로보로스가 아닐까.


70여 년에 걸친 세르펜티 변천사 한눈에
이번 전시에서는 아티스트들의 작품뿐만 아니라 불가리가 이룩해 온 세르펜티 헤리티지를 함께 만날 수 있다. 불가리 주얼리는 특히 스크린 안팎에서 전설적인 배우들의 사랑을 받으며 브랜드 명성을 높였다.

이탈리아 영화 황금기를 상징하는 배우 지나 롤로브리지다(Gina Lollobrigida)를 비롯해 소피아 로렌(Sophia Loren),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 엘리자베스 테일러(Elizabeth Taylor) 등 영화계 은막의 별들이 사랑한 불가리 헤리티지 컬렉션의 11가지 대표 작품을 통해 지난 70여 년에 걸친 세르펜티의 변천사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다. 전시는 4월 13일까지.
강은영 기자 qboo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