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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제 끝났어.”
애써 그림을 그리던 남자는 힘없이 손을 떨궜습니다. 굳어버린 손끝에서 빠져나온 붓이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었습니다. 아름다운 인상주의 그림을 그리며 인기와 명성을 얻었던 남자. 하지만 갑자기 찾아온 뇌졸중이 그의 삶을 바꿨습니다. 다행히도 목숨은 건졌지만, 그 후유증으로 몸의 왼쪽이 불편해지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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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 남자는 왼손잡이였습니다. 그가 자랑하던 경쾌하면서도 섬세한 표현은 이제 불가능했습니다. 떨리는 손으로 남자가 할 수 있었던 건 투박하고 거친 붓질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남자를 두고 말했습니다. “매일 밤 술을 벌컥벌컥 마시더니…. 언젠간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았어. 이제 그 남자는 끝이야.”
하지만 절망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남자에게는 먹여 살려야 할 처자식이 있었습니다. 마음을 가다듬고 붓을 집어 든 남자는 또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한때 초인적인 괴력으로 이름을 떨쳤지만 함정에 빠져 모든 걸 잃고 눈이 멀어버린 성경 속 사나이, 삼손. 남자는 자신과 같은 처지가 된 삼손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그러는 사이 캔버스 속 거칠고 떨리는 선들 사이에서는, 남자도 몰랐던 삶에 대한 새로운 의지가 솟아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로비스 코린트(1858~1925). 독일 출신의 인상주의 화가이자 표현주의의 선구자였습니다.
코린트의 아버지는 독일 시골 마을 농부 집안의 막내아들이었습니다. 스물여덟 살이 된 그는 공장을 하나 갖고 있는 부유한 여성과 결혼했습니다. 그게 집안의 뜻이었으니까요. 여성의 나이는 마흔하나. 그녀는 사별한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10대 자녀를 다섯 명이나 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혼 이듬해, 코린트가 태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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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린트의 어린 시절은 지옥과도 같았습니다. 형들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코린트를 수시로 욕하고 괴롭히며 학대했습니다. “널 죽여버리겠다”고 진심으로 위협한 일도 셀 수 없이 많았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새아버지와 코린트는 집안의 재산을 빼앗아 갈 ‘굴러온 돌’이었습니다. 반면 늦둥이를 사랑으로 품어줘야 할 어머니는 이런 괴롭힘에 무관심했습니다. 무뚝뚝하고 차가운 성격이었던 어머니는 코린트가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가혹하게 혼을 냈습니다. 훈육을 한다며 채찍으로 때릴 때도 있었습니다. 유일하게 코린트를 아끼고 품어 줬던 아버지는 공장을 경영하느라 바빠 아들을 제대로 보호해주지 못했습니다.
학교에 입학한 뒤로도 악몽 같은 나날은 계속됐습니다. 어릴 때부터 학대당한 탓에 코린트는 소심한 아이로 자라났습니다. 성적도 좋지 않았습니다. 나무를 베고 집을 청소하는 등 집안일을 도맡아 하느라 공부할 시간이 없어서였습니다. 이런 코린트를 다른 학생들은 따돌렸습니다. 코린트는 생각했습니다. ‘언젠가는 꼭 성공하고 말겠어. 그래서 나를 무시했던 사람들에게 내가 어떤 사람인지 똑똑히 보여줄 거야.’ 무뚝뚝하고, 감정 기복이 심하고, 성공에 집착하는 코린트의 성격은 이렇게 만들어졌습니다.
단 한 가지, 코린트가 좋아하고 잘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림이었습니다. 그림은 코린트의 유일한 취미였습니다. 형들이 때린 날도, 다른 학생들이 괴롭힌 날도 코린트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슬픔도 괴로움도 어느새 마법처럼 잊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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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시간은 흘렀습니다. 코린트가 열다섯 살이 되던 해,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눈물은 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오히려 코린트의 삶은 훨씬 좋아졌습니다. 의붓자식들에게 저마다 몫의 유산을 떼어준 아버지는 코린트를 데리고 대도시 뮌헨으로 왔고, 미술에 재능을 보이던 그를 뮌헨 예술 아카데미에 입학시켜 줬습니다. 마침내 코린트는 자신을 사랑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던 아버지와 단둘이 살 수 있었습니다. 뛰어난 그림 실력 덕분에 예술학교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만날 수도 있었습니다. 코린트는 훗날 회고했습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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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고향으로 돌아와 마주한 아버지의 모습은 유학을 떠날 때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아버지는 중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코린트는 사랑하는 아버지의 그림을 그리며 마지막 나날을 함께했습니다. 그리고 1889년, 환갑을 한 달 앞두고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 뒤로도 코린트는 평생 아버지를 그리워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해, 코린트는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되새기며 그린 작품으로 성공을 거둡니다. 예수의 죽음을 슬퍼하는 성모 마리아를 그린 작품 ‘피에타’를 통해서였습니다. 이듬해 파리 살롱에 출품된 이 작품은 심사위원들의 심금을 울리며 찬사와 함께 상을 거머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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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부터 코린트의 작품은 인기를 끌기 시작합니다. 그의 작품에는 오랫동안 쌓인 내공에 더해 전통적인 자연주의 그림의 섬세함, 인상주의 그림의 새로운 밝고 자유로운 색채가 모두 녹아 있었습니다. 이런 독특한 화풍의 그림은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불티나게 팔려나갔습니다. 코린트는 독일 미술계의 대세였던 베를린 분리파에 가입해 활발히 활동했고, 40대에 들어선 뒤에는 미술 교실을 열어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학생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면서 비로소 내가 배웠던 것들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림 실력 향상보다 훨씬 더 큰 수확은 따로 있었습니다. 1903년, 운명의 여인인 샤를로테 베렌트를 만난 겁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코린트의 나이는 마흔셋, 베렌트는 스물하나. 코린트는 덩치 크고 무뚝뚝한 아저씨였고, 베렌트는 작고 어리고 발랄한 여학생이었습니다. 먼저 적극적으로 다가선 건 의외로 베렌트였습니다. 결혼하자고 말한 것도 그녀였습니다. 베렌트는 훗날 회고했습니다. “코린트는 무섭게 생겼지만 나는 그 사람의 눈을 봤어요. 병들고 상처 입어서 돌봐 주고 싶어지게 만드는 화가의 눈이였지요. 나는 그 눈을 보고 사랑에 빠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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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린트는 베렌트와의 결혼으로 비로소 완성됐습니다. 아내는 이때까지 코린트가 받지 못했던 변함없는 지지와 사랑을 보내줬습니다. 그녀는 코린트의 모델이자 영감의 원천이기도 했습니다. 사랑스러운 아이도 둘 생겼습니다. 마음의 안정을 찾은 코린트의 창작력은 폭발했습니다. 좀 더 실험적인 그림을 시험하기 시작했고, 일주일에 하나꼴로 그림을 완성했습니다. 행복은 영원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코린트의 건강은 갈수록 나빠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에 대해 “저녁 식사 때 항상 게걸스럽게 먹었고, 자기 옆에 와인 두 주전자를 놓았다”고 기억합니다. 어린 시절의 결핍을 채우고 싶어서였을까요. 코린트는 오래 전부터 폭식하고 폭음하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안 좋은 징조는 넘치도록 있었습니다. 화가의 손은 눈에 띄게 떨렸고, 한 번은 나들이용 배에서 내리다가 물에 빠질 뻔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코린트는 이를 무시한 채 계속 먹고 마셔댔습니다. 그러던 1911년, 47세의 나이에 그는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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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팔과 다리는 그의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았습니다. 걷고 물을 마시는 단순한 일을 할 때도 그는 아내의 도움을 받아야 했습니다. 게다가 그는 평생 왼손으로 그림을 그려온 왼손잡이였습니다. 괴로움은 두 배가 됐습니다. 눈에도 문제가 생겼습니다. 뇌의 왼쪽 시각을 담당하는 부분이 상한 탓에, 시야의 왼쪽 아랫부분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증상이 생겼습니다. 뇌졸중 직후 그린 그림에서는 누구나 코린트가 사물이나 공간의 왼쪽을 보는 능력에 큰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눈은 화가의 생명. 코린트는 절망에 빠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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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도 그의 곁에는 아내가 있었습니다. 아내는 그를 위로하고, 물감과 캔버스를 준비하고, 손에는 팔레트와 붓을 들려 줬습니다. 그림을 다 그린 뒤에는 굳은 손가락에서 붓을 떼어 줬습니다. “내 그림이 형편없지?” 힘없이 묻는 코린트의 말에 아내는 장난스럽게 대답했습니다. “맞아, 정말 못 그렸네. 우리를 먹여 살리려면 연습 좀 해야겠어.” 코린트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다음에는 꼭 훨씬 잘 그려서 너를 놀라게 해 줘야겠네.” 아내가 자신을 진심으로 믿고 사랑해준다는 걸 알았기에, 코린트는 웃으며 기운을 낼 수 있었습니다.
아내의 정성스러운 간호 덕분에 코린트의 몸과 눈은 빠르게 회복됐습니다. 다시 걷는 건 물론이고 헤엄을 칠 수도 있게 됐습니다. 다만 화가다운 섬세한 손동작은 여전히 쉽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코린트의 손은 떨렸습니다. 그는 예전처럼 세부적인 묘사를 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화풍을 확 바꾸기로 했습니다. 거칠지만 자신의 감정을 날것 그대로 드러내는 ‘표현주의’ 스타일의 그림을 그리기로 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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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서울 여의도 더현대서울에서 열리는 ‘인상파, 모네에서 미국으로: 빛, 바다를 건너다’ 특별전에 나와 있는 작품 ‘거울 앞에서’(1912)는 이런 상황이 그대로 반영된 그림입니다. 뇌졸중으로 쓰러졌던 다음 해 그린 이 작품에서는 거울 앞에서 머리를 정리하는 아내와 이를 관찰하며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밝은 색채와 빛의 표현에는 여전히 인상주의의 느낌이 살아 있습니다. 하지만 표현주의적인 거친 붓질과 구도를 통해서는 일종의 긴장감도 느껴집니다. 몸이 불편해진 자신을 돌봐야 하는 아내에 대한 미안함, 젊은 아내가 자신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무의식적인 걱정이 반영돼 있다는 게 미술사학자들의 해석입니다.
코린트는 새 삶을 살기로 했습니다. 그는 술도 끊는 건 물론 생활 습관을 모두 고치고, 새로운 화풍을 완성도 높게 다듬으려 했습니다. 물론 이는 쉽지 않았습니다. 예전과 달라진 몸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우울증은 물론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수시로 그를 덮쳤습니다. 정물화, 풍경화, 초상화…. 뭘 그리든 그의 작품에서는 강렬한 색조와 뒤틀린 형태가 도드라졌고, 여기에 죽음에 대한 예감이 스며들었습니다. 이전 그림들의 주제가 삶의 기쁨이나 감각의 즐거움이었고, 대중에게 인기를 끌기 좋은 ‘예쁜 화풍’이었던 것과 대조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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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런 고통은 결과적으로 코린트의 작품을 한 단계 높은 심오한 경지로 밀어 올렸습니다. 쓰러진 이후 코린트의 작품에는 이전에 없었던 깊이와 힘, 역동성, 내면의 진실이 더해졌습니다. 짧고 거친 붓질, 대각선으로 흔들리는 선에는 코린트의 격렬한 감정과 불안이 녹아들었습니다. 더 이상 코린트에게는 남의 눈치를 볼 이유도, 여유도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 내면을 들여다봤고, 자신을 치유하기 위해 그 속의 고통을 그렸습니다. 사람들도 그의 진정성을 알아봤습니다. ‘예전처럼 그림이 예쁘장하지는 않지만, 코린트의 작품에는 마음을 흔드는 뭔가가 있어.’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에도 그의 명성이 계속 높아졌던 건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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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린트는 늘 자신이 몸의 불편을 자초했다는 자괴감, 고뇌, 노쇠에 대한 두려움, 아직 젊은 아내와 어린아이들을 남겨두고 떠날 수 없다는 절박함에 시달렸습니다. 그의 일기에는 우울감과 절망을 호소하는 수많은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 괴로움을 억누를 수 있는 방법은 그림을 그리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어린 시절에도 그랬던 것처럼, 필사적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괴로움과 불안은 진정됐습니다. 1922년 코린트는 이렇게 일기에 적었습니다. “살아있는 한 나는 언제나 그랬듯이 계속 그림을 그릴 것이다. 나는 나에게 언제나 진실했다. 어쩌면 언젠가 사람들에게 칭찬받을지도 모른다. 나는 내 자리를 굳건히 지키며 싸운 전사니까.”
그렇게 그는 그리고 1925년 5월, 코린트는 매년 그려 오던 자화상을 그렸습니다. 편안한 자세, 노쇠한 피부, 깊은 슬픔을 간직한 눈, 하지만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는 표정. 자화상이 완성된 다음 얼마 안 돼 그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어떻게 만족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마도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했을 겁니다. 그리고 두 달 뒤, 코린트는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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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나치 독일이 코린트의 작품을 ‘퇴폐 미술’로 분류하며 배척했던 적도 있습니다. 히틀러가 그리스·로마 느낌의 고전적인 미술을 숭배하고 현대미술을 혐오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950년대 이후 그의 위상은 반전돼 다시 제자리를 찾았습니다. 지금까지도 코린트는 현대미술의 개척자이자 표현주의 화풍의 선구자, 독일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코린트가 특히 대단한 점은 그가 평생 한 가지 화풍에 정착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새로움을 추구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화가들은 젊을 때 자신만의 예술을 찾아 방황하다가 결국 한 가지 화풍에 정착해 평생 그 작업을 이어갑니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이름이 잘 알려진 뛰어난 화가들도 대다수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정착하지 않고 변화를 추구하는 화가들은 전설이 됩니다. 코린트가 그런 화가였습니다. 뇌졸중에도 그는 좌절하지 않고 더욱 예술에 몰두했고, 자신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젖힐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의 거친 붓질에서는 삶에 대한 코린트의 처절한 집념, 고통에 힘겹게 맞서면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용기, 생(生)에 대한 한 인간의 강렬한 의지가 느껴집니다. 철학자 에릭 호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재능 있는 사람들은 고난을 겪으며 진정한 창조력을 발휘한다. 내면의 고통과 투쟁을 겪는 그들의 고뇌와 비탄은, 위대한 작품이 되어 시대를 초월한다.” 코린트의 삶과 작품이 바로 그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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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더현대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인상주의 특별전에서 로비스의 ‘거울 앞에서’, 모네의 '수련' 등 거장들의 작품을 직접 만나실 수 있습니다. 전시는 5월 26일까지 열립니다.
**이번 기사는 Lovis Corinth(Horst Uhr 지음), Lovis Corinth: Entre impressionisme et expressionnisme(오르셰미술관 전시도록), Mein Leben mit Lovis Corinth(Charlotte Berend-Corinth 지음), 뇌과학 논문 The riddle of style changes in the visual arts after interference with the right brain(Olaf Blanke, Isabella Paqualini)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 담당 기자가 미술사의 거장들과 고고학, 역사 등을 심도 있게 조명하는 연재물입니다. 매주 토요일 새로운 이야기로 찾아옵니다. 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미술 소식과 지금 열리는 전시에 대한 평가, 심층 분석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 구독 중인 7만여명의 독자와 함께 아름다운 작품과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앞서 다뤘던 화가들의 이야기와 아름다운 그림들은 두 권의 책 <명화의 탄생, 그때 그 사람>과 <명화의 발견, 그때 그 사람>으로 곁에 두고 즐길 수도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