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라프 숄츠 총리가 이끄는 SPD와 녹색당은 부채 제동 폐지 또는 개정을, FDP는 유지를 주장했다. SPD와 녹색당은 위기에 빠진 경제를 살리기 위해 전기차 보조금을 되살리고 소득세를 감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재정 매파인 FDP 소속 크리스티안 린트너 재무장관은 재정 개혁으로 예산을 조달하고 부채 제동을 지켜야 한다고 맞섰다. 결국 숄츠 총리가 린트너 재무장관을 해임해 연정이 붕괴했다.
지난 4일 미셸 바르니에 프랑스 총리가 이끄는 내각이 무너진 원인도 예산이었다. 바르니에 총리는 600억유로(약 90조원)를 절감하는 긴축 예산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올해 GDP의 6.1%로 예상되는 재정적자율을 내년 5%로 낮춘다는 계획이었다. 바르니에 내각은 전기요금을 인상하고 연금 수급액을 낮추겠다고 제안했으나, 마린 르펜이 이끄는 국민연합은 이를 거부했다. 결국 국민연합 등 야권이 내각 불신임안을 제출해 바르니에 총리는 임명 석 달 만에 자리에서 물러났다.
재정적자율이 3%를 넘으면 회원국은 초과 적자 시정 절차를 밟는다. GDP 대비 부채비율이 60~90%인 회원국은 매년 부채비율을 0.5%포인트, 90% 이상인 회원국은 1%포인트 감축해야 한다. 이를 준수하지 않으면 매년 GDP의 0.05%포인트씩 벌금이 누적돼 최대 0.25%의 벌금을 매년 내야 한다. 바르니에 내각이 2029년까지 재정적자율을 GDP의 3%로 줄이겠다고 공약한 이유다.
독일과 프랑스는 2년간의 재정준칙 합의 과정에서 가장 크게 대립했다. 정부 부채비율이 올해 62.7%로 EU 내에서 가장 낮은 독일은 “과거의 번영이 오늘과 내일 사회보장의 기초가 될 수 없다”며 엄격한 재정준칙을 주장했다. 반면 부채비율이 높은 프랑스는 “개별 회원국의 주권을 무시하는 정책은 유럽의 생산과 성장에 타격을 줄 것”이라고 맞섰다. 그러나 매파적 태도를 유지한 독일은 급격한 경기 둔화를 극복하기 위해 재정을 확대해야 하고, 비둘기파인 프랑스 정부는 긴축해야 하는 역설적인 상황에 맞닥뜨렸다.
유로스탯에 따르면 EU 인구는 2026년 4억5300만 명으로 정점을 찍은 뒤 2100년 4억2000만 명으로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노인 인구 비중은 20%로 전 대륙 중 가장 높다. 획기적인 생산성 향상의 기회마저 미국에 인공지능(AI) 양자컴퓨팅 등 기술 주도권을 빼앗겼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내년 경제성장률을 0.9%, 독일은 0.7%로 예상했다.
독일 SPD와 프랑스 국민연합 등은 단기 성장률을 높이기 위해 재정지출 확대를 주장하고 있다. 문제는 이로 인한 부채 이자의 증가다.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면 물가가 올라 실질 부채 부담이 줄어들고, GDP 대비 부채 비중도 감소할 수 있다. 현재 유럽의 상황은 그 반대다. 경제성장이 둔화하면서 부채 이자 부담이 눈덩이처럼 커지고, 다시 성장을 압박하는 악순환의 초입에 들어선 것이다. 유럽중앙은행(ECB)은 지난달 금융안정성 검토 보고서를 통해 2034년 프랑스의 GDP 대비 순이자지출액 비율이 현재의 약 두 배인 6%로 상승할 것으로 전망했다. ECB는 “부채 확대와 높은 재정적자, 그리고 약한 장기 성장잠재력으로 (EU 회원국) 국가부채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시장의 우려를 다시 불러일으킬 위험이 있다”며 유로존 위기가 재연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김인엽 기자 insid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