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과 손정의 회장의 만남은 일본이 트럼프 2기를 얼마나 철저하게 대비하는지를 확인시켜주는 장면이었다. 전날 아베 신조 전 총리 부인인 아키에 여사에 이어 손 회장까지 플로리다주 마러라고리조트를 방문해 ‘1000억달러 투자’ 등 선물 보따리를 안기자 트럼프 당선인은 반색했다. 취임 전 외국 정상과 회동하지 않겠다는 기존 입장을 번복하고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와 만날 수 있다는 뜻을 밝혔다. 미 대선 후 윤석열 대통령이 이시바 총리보다 앞서서 더 길게 트럼프 당선인과 전화통화를 한 한국의 대미외교 우위는 어느새 사라져버린 모습이었다.
마이크를 이어받은 손 회장은 “트럼프 당선인의 위대한 승리를 축하한다”며 “트럼프 당선 후 미국 경제에 대한 자신감이 대단히 강해졌다”고 추어올렸다. 또 2016년 트럼프 당선 때 500억달러 대미 투자를 약속한 것을 거론하며 “트럼프는 무엇이든 강하게 밀어붙이는 대통령이기 때문에 나도 (투자액을) 두 배로 올렸다”고 말했다.
트럼프 당선인은 투자금액을 두 배로 늘려서 2000억달러로 해달라고 가볍게 농담을 던졌다. 손 회장은 웃으며 “역시 대단한 협상가”라며 “당신의 리더십과 나의 파트너십으로 이 일이 되게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소프트뱅크그룹은 주로 인공지능(AI) 등 기술 분야 투자를 추진할 전망이다.
일본 언론은 그동안 트럼프 2기 대미 외교에 우려를 나타냈다. 대선 결과가 확정된 지난달 6일 트럼프 당선인에게 각국 정상의 축하 전화가 이어졌을 때 이시바 총리는 윤 대통령보다 늦게, 훨씬 짧은 시간(윤 대통령 12분, 이시바 총리 5분) 통화했다. 소극적인 스타일의 이시바 총리를 아베 전 총리의 골프 외교와 비교하며 비판하는 보도가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분위기가 180도 달라졌다. 트럼프 당선인은 이날 주일본대사로 조지 글래스 전 주포르투갈대사를 임명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일본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도 말했다. 한국대사는 아직 발표되지 않았다. 트럼프 당선인 측은 최근 한국 외교가에 탄핵정국 상황에서 누구와 접촉해야 할지 문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무엇보다 트럼프 당선인과 통화하거나 만나 협상할 주체가 뚜렷하지 않다. 한덕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나설 수는 있지만, 권한대행 신분으로 적극적인 외교를 추진하긴 어렵다.
차기 정부가 제대로 전열을 정비해 트럼프 측과 협상할 준비를 하려면 1년은 걸릴 것이라는 게 워싱턴 외교가의 전망이다. 현지 재계 관계자는 “고위직에 있는 이들은 어차피 물러나야 한다고 생각할 테니 트럼프 정부와 관계를 수립하려 애쓸 필요가 있겠느냐”고 했다.
워싱턴=이상은 특파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