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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스크가 장관 못하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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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병욱 정치부 차장

“백지신탁 제도라는 게 있다. 장관이 되면 가진 주식을 다 내려놓아야 한다. 자식처럼 키운 기업의 주식을 포기하면서까지 장관 하실 분은 많지 않다. 일론 머스크나 빌 게이츠 같은 분이 계신다 해도 그분들을 장관으로 쓸 수 없다.”

대통령실 관계자가 한 말이라 생각하겠지만, 발언의 주인공은 윤건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다. 2021년 라디오 방송에서다. 윤 의원이 언급한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가 미국 도널드 트럼프 2기 정부에 신설되는 정부효율부(DOGE) 수장으로 지난 12일 지명됐다. 미국 관료주의를 개혁하고 정부의 재정 지출을 대폭 줄이는 역할이다. 놀랄 일이 아니다. 미국에선 기업인 출신 장관이 손에 꼽기 힘들 정도로 많다.
인적 쇄신 막는 백지신탁 제도
잘나가는 기업인을 내각에 쓰고 싶은 건 미국 대통령만의 욕심이 아니다. 한국 역대 대통령들도 좌우를 가리지 않고 기업인 입각을 검토했다. 하지만 시도는 대부분 실패했다. 당사자들이 고사해서다. 가족들까지 도마 위에 올려 난도질하는 인사청문회가 가장 큰 이유지만, 그에 못지않게 자주 거론된 이유는 백지신탁 제도였다.

백지신탁은 고위공직자가 직무상 알게 된 정보를 이용해 주식거래를 하거나 주가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막기 위해 보유주식(3000만원 초과 시) 관리를 제3자에게 맡기는(신탁하는) 제도다. 백지신탁의 원조는 미국이다. 머스크 CEO가 부처가 아니라 위원회 성격의 DOGE 수장에 지목된 것도 백지신탁 때문이다.

하지만 두 나라 제도에는 결정적 차이가 있다. 한국 공직자윤리법은 신탁주식을 관리하는 수탁기관이 60일 이내 해당 주식을 모두 처분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기업인이 공직자가 되려면 보유주식을 다 팔아야 하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 때 황철주 주성엔지니어링 회장이 중소기업청장에 내정됐다가 사의한 것도 이 때문이다. 황 회장은 보유주식을 맡겨두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가 뒤늦게 모두 팔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사퇴했다.
野가 앞장서 제도 개선한다면
미국은 수탁기관이 독립적으로 신탁재산을 관리하면 될 뿐, 무조건 매각할 필요가 없다. 맡은 자리와 보유주식이 고도의 직무 관련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처분을 강제하는데, 매우 제한적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도 보유주식을 팔지 않았다.

백지신탁 제도의 취지를 인정하더라도, 기업인들이 공직을 맡으려면 보유주식을 강제로 다 팔게 하는 제도가 옳은지는 생각해봐야 한다. 윤 의원 말처럼 길어야 2~3년 동안 장관 하려고 평생을 일궈온 기업의 주식을 파는 건 쉽지 않은 결정이다. 기업인들이 이해상충 가능성을 피하면서도 공직자로 일할 수 있는 길이 없는 것도 아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대적인 인적 쇄신을 계획하고 있다. 국제 정세와 경제 상황 등을 감안하면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그 어느 때보다 유능하고 참신한 인재가 필요하다. 평소처럼 정치인, 관료, 교수들로 대통령실과 내각을 채워선 안 된다는 목소리가 크다.

마침 윤 의원은 공직자윤리법을 논의할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의 야당 간사다. 야권에선 이재명 민주당 대표를 두고 ‘프레지덴셜하다’(대통령 같은 행보를 한다)는 얘기가 나온다. 이런 두 사람이 앞장서 백지신탁 제도를 보다 유연하게 바꾸면 어떨까.

오늘의 신문 - 2024.11.15(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