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의 본질은 신뢰에 있다는 단순한 사실을 새삼 이해하고부터 비트코인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암호화폐산업을 취재한다고 하면 적잖은 사람이 ‘비트코인은 망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여전히 비트코인 신뢰에 기반이 되는 탈중앙화된 블록체인 기술의 원리를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비트코인 한 개와 베네수엘라 통화 1볼리바르 가운데 무엇을 선택하겠느냐’고 되물으면 대부분 고개를 끄덕인다. 전 세계 사람에게 ‘1비트코인과 9600만원(현재 시세) 중 무엇을 받겠느냐’고 질문하면 결과는 어떨까. 한국인을 제외하고는 비트코인 선호도가 더 높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한다.
원화를 선택하는 사람은 비트코인 가격에 대한 불확실성을 첫손가락에 꼽을 것이다. 2021년 11월 8100만원대에 거래된 비트코인이 2000만원대로 곤두박질치는 데 1년도 채 안 걸렸다. 물론 2022년 2000만원대였던 비트코인이 1억원대로 치솟기까지도 2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변동성이 지나친 건 화폐로서 매우 큰 약점이다. 비트코인이 실제 결제 수단으로 확대되지 못하는 것은 이런 이유가 크다.
반면 비트코인을 선택하는 사람은 비트코인으로 받는 게 빠르고 간편하기 때문일 것이다. 비트코인은 은행 계좌 없이 디지털 지갑만 있으면 된다. 비트코인을 송금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10분~1시간이다. 수수료도 수천~수만원이다. 원화를 달러로 송금하는 데는 이틀 이상 걸린다. 여기에 환전 수수료, 각종 신고 절차 등을 고려하면 비트코인으로 받는 게 이익으로 느껴질 수 있다. 더구나 전 세계 은행 계좌가 없는 사람은 20억 명이 넘는다. 금융사와 거래하지 못하는 이러한 ‘언뱅크드(unbanked)’는 원화가 아니라 비트코인을 선택할 것이다.
법정화폐와 비트코인의 한계를 극복한 것이 스테이블 코인이다. 테더, 유에스디코인 등 스테이블 코인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통화인 달러의 가치와 1 대 1로 연동돼 있다. 변동성이 큰 일반 암호화폐와 달리 가치를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설계됐다. 발행사는 스테이블 코인을 발행한 만큼 미국 국채, 달러, 금 등 안전 자산을 준비금으로 마련해둔다. 스테이블 코인은 암호화폐지만 생명력의 원천은 달러다. 웬만한 법정화폐 이상의 신뢰를 확보했다는 얘기다. 송금이 간편한 것은 물론 변동성도 크지 않기 때문에 결제 수단으로서 쓰일 가능성도 충분하다.
스테이블 코인의 리스크 중 하나는 각국의 규제다. 유럽에서는 글로벌 1위 스테이블 코인인 테더의 상장이 폐지됐다. 하지만 유럽 내 암호화폐거래소에서 거래를 못 하는 것일 뿐 탈중앙화거래소나 개인 간 거래는 가능하다. 한국 정부도 스테이블 코인 거래 신고를 의무화한다지만, 음성적 거래를 부추길 것이란 전망이 많다.
스테이블 코인 발행사에 대한 신뢰가 여전히 부족하다는 지적은 타당하다. 스테이블 코인 발행사의 준비 자산에 대한 투명성에 의문이 생기면 테더 가치는 폭락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리스크는 국가도 없다고 할 수 없다. 한국 역시 외환위기 당시 외화 부족과 정책 실패 등으로 신뢰가 붕괴하면서 원화 가치가 급락했다. 물론 한국은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 금융을 통해 회복할 수 있었다. 스테이블 코인은 시장 자체에서 해결해야 하는 한계가 있다. 실제 테더는 2021년 발행한 스테이블 코인에 상응하는 충분한 준비 자산을 갖추지 않았다는 의혹을 받았다. 이후 준비 자산을 공개하고 미국 국채 보유량을 늘리면서 시장의 신뢰를 회복했다.
스테이블 코인이 인공지능(AI) 발전과 맞물리면 그 변화는 상상하기가 어렵다. AI는 365일 24시간 국경을 넘나들며 서비스를 제공할 텐데, 스테이블 코인은 복잡한 절차나 별도 환전 없이 실시간 결제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스테이블 코인의 확산이 생각보다 빠르고 광범위할 것 같다는 짐작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