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올 들어 이날까지 기업이 경영권 분쟁 과정에서 공시한 ‘소송 등의 제기·신청’(경영권 분쟁 소송)은 73개사 242건이었다. 집계를 시작한 2000년대 이후 가장 많은 건수다. 지난해 같은 기간(71개사 219건) 대비 10.5% 증가했다.
올해는 특히 규모가 큰 유가증권시장 상장기업을 둘러싼 분쟁이 두드러졌다. 지난해 60건(27.6%)에서 올해 100건(41.8%)으로 늘었다. 기존에는 주로 코스닥시장 기업의 소액주주가 대주주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이 대부분이었으나 올해는 고려아연, 한미사이언스, 금호석유화학, 다올투자증권, JB금융지주 등 대기업과 금융사가 대거 분쟁에 휘말렸다.
경영권 분쟁 유형도 다양하다. 상속 과정에서 가족 간 갈등으로 촉발된 한미사이언스, 동업자 간 갈등이 파국으로 치달은 고려아연과 에프앤가이드, 최대주주와 2대주주 간 지분 싸움이 예고된 티웨이항공과 쏘카 등이 대표적 사례다. 최대주주인 배우 이정재 씨와 창업자가 분쟁 중인 드라마 제작사 래몽래인 등도 시장에서 주목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저평가 기업의 가치 상승과 지배구조 개선 요구 압박 강화, PEF 등 외부 자금을 활용한 공개매수 활성화, 증권사 등 금융회사의 분쟁 참여 증가에 따라 국내에서도 경영권 분쟁과 적대적 인수합병(M&A)이 빈번할 것으로 보고 있다.
MBK 성공 땐 '전략 따라하기'…소액주주·PEF '동맹' 가능성도
투자은행(IB)업계에선 금호석유화학 한진칼 한솔케미칼 등 전통적인 대기업과 엔씨소프트 크래프톤 넷마블 등 게임사, 한미사이언스 HLB 광동제약 등 바이오 기업을 대표적인 ‘사정권’ 내 기업으로 꼽는다. 가족 간 잠재 갈등이 남아 있는 DB와 DB하이텍, 2대 주주인 쉰들러가 경영권 공세를 펴온 현대엘리베이터도 분쟁 가능성이 있다.
NH투자증권 리서치본부 투자전략부는 “주요 주주 간 지분율 차이가 크지 않고, 밸류에이션 매력이 있으며 풍부한 현금을 보유한 기업들이 분쟁을 겪을 가능성이 크다”고 진단했다.
한 대형 PEF 관계자는 “MBK파트너스는 전략 입찰에서 높은 가격에 회사를 매입한 뒤 저금리로 풀린 유동성 덕에 더 비싸게 파는 ‘모멘텀’ 플레이를 가장 잘했는데, 고금리 시기엔 통하지 않아 경영권 분쟁으로 전략을 바꿨다”며 “MBK가 변신에 성공하면 다른 PEF들도 투자자(LP)를 설득하기 한결 쉬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기존의 분쟁 공식도 깨질 것이라는 진단이 나온다. 최대주주 및 특수관계인의 경영권 지분율이 30% 이상이면 경영권을 지킬 수 있다는 관행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당장 지분이 적더라도 외부 자금을 활용하면 현재 주가에 일정 프리미엄을 얹어 공개매수를 실시하고 나머지 주주들을 포섭해 지분율을 끌어올릴 수 있다. 과거에는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한 소액주주들이 PEF와 손잡고 경영권을 노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일각에서는 일본에서 2005년 닛폰방송(NBS)을 둘러싼 라이브도어와 후지TV 간 경영권 전쟁이 국민적인 화제가 된 뒤 경영권 방어수단 도입 논의가 본격화된 것처럼 국내에서도 고려아연 분쟁 이후 이 같은 논의가 촉발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차준호/박종관/하지은 기자 pj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