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는 21일 보도자료를 통해 전영현 신임 반도체(DS)부문장(부회장)을 임명한 이유를 이렇게 표현했다. ‘31년 연속 메모리 반도체 세계 1위’ 신화를 쓴 삼성전자 DS부문이 스스로 ‘위기’를 인정한 건 사실상 처음이다. 고대역폭메모리(HBM),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등 미래 반도체 사업의 승부처에서 경쟁사에 밀리는 상황을 쉽사리 뒤집지 못한 탓이다.
지난해 15조원에 달하는 영업적자로 DS부문 연말 성과급이 ‘0원’으로 책정되면서 직원 사기도 떨어졌다. 업계에선 위기에 빠진 삼성 반도체를 살릴 ‘구원투수’로 등판한 전 부문장이 분위기 쇄신과 기술 경쟁력 강화에 강한 드라이브를 걸 것이란 관측을 내놓고 있다.
발목을 잡은 건 HBM 시장의 ‘최대 큰손’인 엔비디아였다. 삼성전자는 현재 HBM3 8·12단, HBM3E 8·12단 등 제품 4종을 엔비디아에 보내 품질 테스트를 받고 있다. 최신 HBM3E 제품은 ‘5월 중’ 품질 테스트 통과를 목표로 하고 있지만, 아직 이렇다 할 답이 오지 않았다. 최근엔 엔비디아의 긴급 호출로 HBM TF 수장인 황상준 D램개발실장(부사장)이 미국 출장을 떠나기도 했다.
2년5개월 동안 DS부문을 이끈 경계현 사장은 올 초 임직원 대상 소통행사에서 “HBM 위기론이 불거졌을 때 ‘책임지고 물러날까’란 생각도 했지만 사업을 정상화하는 게 우선”이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최근 HBM을 둘러싼 경쟁력 회복 속도가 더뎌지면서 ‘돌파구 마련을 위한 자진 사임’을 선택한 것으로 분석된다.
당시 삼성은 그에게 DS부문장이 아니라 배터리 전문인 삼성SDI의 대표(사장)를 맡겼다. 삼성SDI는 2016년 갤럭시 노트7 리콜 사태의 주범으로 배터리가 지목되면서 2년 연속 영업적자를 기록하는 등 위기에 처한 상태였다. 전 부문장은 ‘품질 경영’을 앞세워 서두르지 않고 내실을 다지는 데 주력했다. 그가 취임한 직후인 2018년 삼성SDI는 흑자로 돌아선 데 이어 2020년엔 영업이익이 6713억원으로 늘었다.
내년 양산이 시작되는 HBM4는 향후 시장 주도권을 가를 승부처로 평가된다. HBM4부터는 파운드리 기업과의 협업이 필수다. HBM 컨트롤 역할을 하는 ‘로직 다이’에 기능을 추가하고 전력 소모도 줄이려면 초미세공정에 능한 파운드리의 도움을 받아야 해서다. SK하이닉스가 세계 1위 파운드리 기업인 TSMC와 협업을 공식화한 상태라 삼성전자의 긴장감은 커지고 있다. 삼성전자는 자체 파운드리사업부를 HBM4 개발에 끌어들이는 식으로 대응할 계획이다.
차세대 메모리 사업을 성공적으로 안착시켜야 하는 과제도 있다. 올 2분기 말까지 메모리사업부는 용량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컴퓨트익스프레스링크(CXL) D램과 서버용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를 구독형으로 판매하는 ‘SSDaaS’ 사업을 시작한다.
TSMC와의 점유율 격차가 50%포인트에 달하는 파운드리사업부의 중흥도 전 부문장이 풀어야 할 숙제다. 엔비디아, AMD 같은 고성능컴퓨팅(HPC)칩 전문 고객사를 확보하는 것이 우선 과제로 꼽힌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전 부문장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품질을 높이는 것을 가장 중시하는 경영자”라며 “HBM과 파운드리 경쟁력 약화의 근본 원인을 찾아 서두르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 주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황정수/박의명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