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 위에 지어진 도박과 컨벤션의 도시.’
약 100년간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를 수식하는 한 문장이었다. 지금은 다르다. 지난해 9월 문을 연 세계 최초, 최대의 동그란 구 형태 공연장 스피어(Sphere)가 문을 열면서다.
미국 매디슨스퀘어가든그룹과 샌즈그룹이 5년 이상 23억달러(약 3조원)를 투자한 이 건축물은 라스베이거스를 단숨에 ‘22세기 라이브 엔터테인먼트의 수도’로 만들었다.
오는 9일 개막하는 세계 최대 IT·가전 전시회 ‘CES 2024’를 앞두고 미리 가본 스피어는 지구 위에 불시착한 ‘미래의 행성’ 같았다. 지름과 높이가 100m를 넘고 면적만 5만4000㎡에 달하는 스피어는 문을 열자마자 ‘세계에서 가장 큰 옥외 광고판’이자 ‘세상에 없는 미디어 캔버스’로 거듭났다. 올해 라스베이거스에 가는 많은 사람이 “CES 간 김에 쇼 하나 보고 온다”고 하는 대신 “스피어 보러 CES 간다”고 말하는 이유다.
초고화질 16K LED 스크린이 축구장 두 개 크기만큼 펼쳐지는 스피어 내부는 16만7000개의 인공지능(AI) 기반 스피커는 물론 바람과 냄새, 온도까지 제어하는 햅틱 기술과 만나 ‘초현실, 초감각’의 세계로 사람들을 이끈다. 관람객을 맞이하는 것은 스피어의 AI 로봇 ‘아우라’.
스피어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미리 만나는 미래’다. ‘올 투게더, 올 온’을 주제로 한 CES 2024에 세상을 놀라게 할 새로운 기술들이 다 있다.
“이게 뭐야? 진짜야, 합성이야?”
작년 말부터 사람들의 눈을 의심케 한 영상이 하나 있다. 180도의 화면 위에 떠오른 하얀 구름과 파란 하늘, 그 안에서 노래하는 록밴드 U2의 보노. 틱톡과 인스타그램 등에서 수억 건의 조회수를 기록하며 순식간에 퍼진 영상의 주인공은 지난해 9월 공식 개장한 세계 최초, 최대 구 형태 공연장인 ‘스피어’의 첫 콘서트였다.
‘U2·UV’라는 제목으로 열리는 이 공연은 1인당 입장료만 최저 500달러에서 최고 1000달러를 넘어서는데도 올 3월까지 입장권이 대부분 매진됐다. 작년 9월 29일부터 20회 공연으로 기획된 이 공연은 전 세계에서 몰려든 수요로 두 차례 연장되며 오는 3월 2일까지 총 40회를 이어가기로 했다. 17회의 공연 티켓 판매액으로만 1억1000만달러(약 1436억5000만원) 매출을 올렸다. 1930년대 라스베이거스가 도시의 모습을 갖춘 이후 단일 공연 수익으로 최단기간, 최고 매출 기록이다.
스피어에서의 경험에는 이런 숫자 이상의 것이 담겨 있다. 지금까지 본 것과 들었던 것, 우리의 예술적 경험의 경계를 가차 없이 허물기 때문이다. 라스베이거스 어디서든 보이는 거대한 행성은 360도 파사드가 쉴 새 없이 빛을 뿜고 움직이며 귀여운 이모티콘이 됐다가, 세상에서 가장 큰 눈동자로 변한다. 3차원의 심해로 빨아들이는가 하면 활활 타는 불꽃으로 순식간에 변하기도 한다. 스피어 내부는 미지의 우주 여행을 떠오르게 한다. 익히 봐온 풀과 나무도, 언젠가 봤던 예술 작품도 둥글고 거대한 스피어의 초고화질 스크린 안에선 그동안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던 것처럼 느껴진다.
인간이 만든 첨단의 모든 기술을 담아 감각의 끝까지 자극하는 이 기념비적 건축물은 눈으로 직접 감상하지 않고서는 온전히 알기 힘들다. 오로지 스피어여서 가능했던 경험들을 기록했다. 인생에서 한 번쯤 스피어를 느끼러 라스베이거스에 가는 이들을 위해.
스피어 첫 콘서트 'U2·UV 공연' 리뷰
180도 스크린에 어떤 자리든 '몰입'
명곡과 찰떡인 예술작품 영상 띄워
세상 어디에도 없던 무대에 환호성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슬롯머신의 소음과 뿌연 담배 연기, 화려한 도시의 불빛으로 가득한 ‘씬 시티’ 라스베이거스. 그 혼돈을 뚫고 도시 한쪽에 사뿐히 내려앉은 둥글고 거대한 행성으로 향했다. 그 행성의 이름은 ‘스피어(Sphere)’. 작년 가을부터 영상과 사진으로 SNS를 후끈 달아오르게 한 그 스피어를 지난달 15일 저녁 찾았다. 이날은 세계적인 록밴드 U2의 ‘U2·UV-Achtung Baby’ 스물네 번째 공연이 열리는 날. 좁은 복도에 약 2만 명의 인파와 긴 줄을 서서 스피어로 향하는 길은 꼭 우주로 향하는 것만 같았다. 대기하는 복도에선 마치 지구를 떠나는 금세기 마지막 인류가 된 것 같은 착각마저 일으켰다.
180도 스크린으로 만난 보노와 U2
스피어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건 지난해 7월 4일 미국 독립기념일 밤이었지만, 세계인들에게 ‘나도 한번 가보고 싶다’는 명성을 듣게 된 건 U2의 콘서트가 열리면서다. 지난해 9월 29일을 시작으로 오는 3월 2일까지 장장 5개월간 40회에 걸친 공연이다. 그것도 2019년 이후 라이브 공연을 하지 않았던 전설의 록밴드 U2라니.
공연장은 거대한 스크린이 관객석을 180도 둘러싸고 있었다. “1층과 무대 앞 스탠딩석보다 뒤로 갈수록 감동이 더 크다”는 리뷰를 보고 400열 인근에 자리를 잡았다. 외관이 360도의 살아있는 파사드를 자랑한다면 내부의 스크린은 세계 최고 수준의 16K 고화질 LED(발광다이오드)로 압도했다. 인간의 시야각이 감상할 수 있는 최대치를 구현해 어느 좌석에 앉아도 무대와 스크린이 또렷하게 잘 보였다.
1980년대부터 파격적인 무대 실험을 해온 U2는 무대 장치를 직접 설계하는 대신 예술가들과 손잡았다. 에스 데블린, 존 제라드, 마르코 브람빌라 등과 협업한 영상들이 끝없이 180도 스크린에 투사됐다. U2는 숫자로 가득 찬 매트릭스의 세계로 떠났다가, 거대한 크리스마스 궁전으로 들어갔다가, 웅장한 호수 위를 걷기도 했다. 네바다주의 사막 위에서 노래하는가 하면 별이 쏟아지는 우주의 무중력 상태로 빨려들어 노래했다. 이들은 때론 화염과 불꽃에 휩싸이기도 했다.
반세기 록밴드의 관록, 최첨단과의 조우
1976년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데뷔한 U2는 스피어 장기 공연에서 마치 자신들의 일대기를 다 보여주려는 것 같았다. U2를 세계적으로 알린 1992~1993년 ‘ZOO TV’ 투어의 4D(4차원) 버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U2는 당시 투어의 오프닝곡이었던 ‘Zoo Station’을 첫 곡으로 골랐다. 2억 장 가까운 앨범 판매를 하고, 22개의 그래미상을 받은 저력을 뽐내듯 ‘Acthung Baby’ 앨범의 수록곡 전곡은 물론 ‘With Or Without You’ ‘Beautiful Day’ ‘Vertigo’ 등 스물두 곡을 불렀다. 시즌을 의식한 듯 캐럴을 부르기도 했고, 비틀스와 엘비스 프레슬리의 곡도 리메이크했다.
스피어 제작영화 '지구에서 온 엽서' 리뷰
네바다주는 거대한 사막 지대다. 네바다주의 대표 도시인 라스베이거스는 1935년 콜로라도강에 ‘후버댐’을 지으며 도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척박했던 땅을 인간의 손으로 개척하고, 카지노를 합법화하며 세계적인 관광 도시가 된, 미국 내에서도 손꼽히는 그야말로 ‘혁신의 땅’이다.
라스베이거스 카지노와 호텔에만 머물다 간 사람들은 이 도시 인근에 드넓게 펼쳐진 네바다주의 대자연이 얼마나 신비로운지 알지 못한다. 인공의 불빛에 현혹돼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였을까. 라스베이거스 스피어가 개장하며 직접 제작한 50분짜리 영화 ‘지구에서 온 엽서(Postcard From Earth)’는 네바다주 사막 협곡을 넘어 심해의 물고기떼, 정글의 작은 곤충과 아프리카 초원의 기린은 물론 사자와 각종 희귀 식물까지 도시인들이 직접 마주하기 힘든 자연의 속살을 파노라마로 펼쳐 놓는다.
감독은 영화 ‘블랙스완’ ‘더 웨일’ 등을 연출한 대런 아로노프스키. 지구와 우주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공상과학(SF) 영화이자, 생태계의 경이와 우주의 광활함을 담은 스펙터클을 선보였다. 스피어는 U2처럼 세계적인 밴드의 공연 무대로서도 손색없지만, 스피어가 줄 수 있는 최대치의 매력을 경험하고 싶다면 ‘스피어 익스피리언스: 지구에서 온 엽서’를 더 추천한다. 갑작스레 원숭이가 튀어나오고, 지진으로 의자가 흔들리고, 사막의 모래바람과 함께 서늘함이 느껴지고, 물고기떼를 만날 땐 차가운 물 속에 들어간 듯 50분간 오감을 모조리 깨울 수 있다.
다만 파괴된 지구에서 우주의 어떤 행성으로 날아가 다시 지구를 들여다보는 설정과 “우리는 우리가 가장 사랑한 것을 파괴하고 있다”는 메시지가 전부인 교훈적 서사는 다소 진부하다.
스피어를 만든 사람들
모든 첨단기술 응축한 '꿈의 공간' 창조
에스 데블린 등 유명 예술가 대거 초청
수많은 명곡과 예술작품 접점 찾아내
라스베이거스 스피어는 고글도, 헤드셋도 없이 맨몸으로 ‘초월적 감각’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몰입형 예술은 이제 흔해졌지만 스피어는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예술의 경계를 허문다. 아무리 뛰어난 미술관에 가더라도 환호하며 박수치는 사람은 없고, 아무리 멋진 사운드의 공연을 접하더라도 시각적 환희까지 느끼기는 쉽지 않은 일. 스피어 안에선 16만7000개의 스피커가 귀를 자극하고, 축구장 2개 크기의 초고화질 스크린이 시각적 압도감을 선사한다. 냄새와 미세한 진동까지 느껴져 그야말로 ‘인간이 동시에 감각할 수 있는 모든 자극’이 아무런 장비 없이도 가능한 셈이다.
‘뉴욕의 억만장자’ 제임스 돌런
동시대의 첨단 기술이 모두 응축된 ‘22세기형 엔터테인먼트의 끝’을 만든 사람은 누구일까. 이 무모한 도전을 한 사람은 미국 매디슨스퀘어가든그룹을 이끌고 있는 미국의 사업가 제임스 로런스 돌런 회장(69)이다. 그는 매디슨스퀘어가든그룹을 이끌고 있는 미국 스포츠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거물. 돌런 회장은 매디슨스퀘어가든 스포츠와 엔터테인먼트, MSG네트웍스 및 스피어엔터테인먼트를 이끌며 뉴욕닉스(농구팀)와 뉴욕레인저스(하키팀)의 구단주도 맡고 있다. 스스로를 ‘음악가’라고 소개할 정도로 음악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그는 어느 날 둥근 지구 모양의 공연장 설계도를 스케치하며 “라이브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재창조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일생의 꿈을 스피어를 통해 이뤘다고 말한다.
2018년 착공한 스피어 건설은 우여곡절도 많았다. 초기 12억달러였던 예산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건축비에만 23억달러를 썼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완공은 2년 이상 늦어졌지만 일부 개인 자산을 매각하고 회사 구조조정을 단행하며 라스베이거스의 랜드마크 건설을 주도했다. 스피어의 런던 진출이 ‘빛 공해 이슈’로 무산되고, 스피어 개관으로 인해 모기업이 적자를 기록하고 있지만 아부다비 등 세계 주요 도시로의 진출을 계속 타진하고 있다.
스피어의 예술가들은
U2의 공연을 위해 스피어엔터테인먼트는 동시대 예술가들을 대거 초청해 ‘레지던시’를 운영했다. 그 결과 U2의 1980년대부터 지금에 이르는 수많은 명곡과 동시대 예술의 접점을 찾아냈다.
루이비통 런웨이 등의 무대 디자인으로 유명한 에스 데블린은 U2의 라이브 공연 무대를 위해 ‘네바다 아크(Nevada Ark)’를 만들었다. 멸종 위기에 처한 네바다주의 250여 종 동식물을 무대에 불러낸 것. 어두운 단색의 스케치로 나타난 이 동식물들의 형태는 U2·UV 공연의 마지막 곡 ‘뷰티풀 데이’가 흐르면서 점차 화려한 본래의 색을 입고 반짝이는 빛에 휩싸인다.
앰비언트 음악(전자음 등 최소한의 소리로 만든 명상적 장르)의 개척자이자 데이비드 보위, U2, 콜드플레이의 앨범 프로듀서로도 유명한 브라이언 이노의 ‘LED 턴테이블’(2021) 작품은 서정적 멜로디의 음악과 함께 무대 전체를 오묘한 색깔들로 물들였다.
'넘사벽 스케일' 스피어의 스펙
향기·진동까지 느껴져…오감 초월한 자극
유튜브 스타 된 스피어, 파급효과 어마어마
하루 광고비만 '6억'인데…구글·삼성 줄서
어떤 기술이 적용됐길래
스피어에서 열리는 공연이나 영화를 예매하면 ‘22세기 미래로의 초대장’을 받는다. 말 그대로 21세기 기술을 총집합시켜 다음 세기에서나 볼 법한 상상 속 공간을 보여주겠다는 뜻이다. 일단 건축물 자체가 기념비적이다. 3000t의 철강이 쓰이고 1만t의 콘크리트가 지붕을 덮고 있다. 외관에 쓰인 LED(발광다이오드) 면적은 5만4000㎡. 16K 초고화질 LED로 무장한 스피어의 내부 스크린은 1만5000㎡ 넓이를 자랑한다. 축구장 두 개에 맞먹는 규모다. 이렇게 조형된 화면엔 고도로 시뮬레이션된 바람과 향기, ‘빔 포밍’이라는 오디오 기술이 녹아 있다. 내장된 스피커 수만 16만7000개.
스피어의 기술은 외관에서도 빛을 발한다. 5만4000㎡에 달하는 면적이 ‘야외 디지털 캔버스’이자 ‘초대형 광고판’인 셈이다. 외부 광고 비용은 하루 45만달러(약 5억8900만원). 높은 가격에도 최근 메이플스토리와 구글, 삼성전자 등도 광고를 집행했다.
‘씬 시티’여서 가능했던 모험
스피어는 겉모습과 짧은 공연 실황 영상만으로 단숨에 전 세계인의 ‘핫플레이스’가 됐다. 하지만 ‘빛 공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최근 ‘스피어 런던’도 빛 공해를 이유로 무산됐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24시간 잠들지 않는 라스베이거스의 불빛, 미로 같은 초대형 카지노와 관광 인프라가 오히려 스피어를 라스베이거스에 짓는 동력이 됐다.
어디서 잘 보이나, 입장료는 얼마?
대형 건축물은 멀리서 감상할 때 더 멋지다. 스피어의 미디어 파사드를 온전히 즐기고 싶다면 ‘더 웨스틴 라스베이거스 호텔’ 주차타워에 가보자. 스피어에서 걸어서 10분 거리로 언제든 입장이 가능하다. 라스베이거스의 명물인 대관람차 ‘하이 롤러’ 안에서도 느긋하게 ‘스피어 쇼’를 볼 수 있다. 가격은 시간대에 따라 1인당 29~38달러다.
스피어 내부로의 입장은 까다롭다. 가로세로 약 15.2㎝(6인치) 넘는 가방을 들고 갈 수 없고 촬영 장비도 허용하지 않는다. 하루 3~4회 상영하는 ‘스피어 익스피리언스: 지구에서 온 엽서’를 예매하는 게 현재로선 가장 저렴한 방법이다. 1인당 119~169달러에 영화 상영 50분, 공간 체험 시간이 약 1시간 주어진다.
라스베이거스=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