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흐의 이 작품은 아버지 장례식 이후에 그린 <성경이 있는 정물(Still Life with the Bible, 1885)>이다. 이 작품에는 아버지와의 갈등과 함께 고흐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엿볼 수 있는 요소들이 등장한다. 중앙에 성경이 크게 펼쳐져 있고 그 앞에는 <삶의 기쁨(La Joie de vivre)>이라 적힌 책이 놓여 있다. 또한 오른쪽에는 꺼진 촛대가 흐릿하게 있다. 성경이 고흐의 아버지, 반면 <삶의 기쁨>이 고흐를 상징한다고 본다면, 이 작품은 고흐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이 과정에서 경쟁자였던 아버지에게서 말투, 행동, 습관, 가치관, 이상 등에 있어 본받을 구석을 전혀 찾지 못하게 되면 아버지와의 동일시 과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아들은 성인기에 이르기까지 어머니에 대한 애착관계를 보이게 된다. 고흐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아버지와의 잦은 다툼과 어머니에 대한 집착으로 극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성경이 있는 정물>은 그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이런 갈등을 읽을 수 있는 하나의 근거가 된다.
하지만 또다시 파리 지점으로 파견되어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런던과 파리의 지사를 오가다가 결국 해고설이 불거졌다. 이때 고흐는 스스로 사직서를 제출했는데, 이는 첫사랑의 실패와 친구 두 명과 동생 테오 친구의 죽음 등 연이은 비극의 시기를 겪으면서 마음이 산산조각 났기 때문이다. 이때 고흐는 아버지의 빈자리를 찰스 디킨스의 문학 작품으로 대체하고 있었다. 하지만 찰스 디킨스도 얼마 있다가 죽게 되면서 고흐의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커졌다.
이로 인하여 고흐는 아버지의 부재에 대해 또다시 상처를 받았다. 그는 아버지를 역까지 배웅한 후 기차가 떠나고 그 모습이 다 사라질 때까지 한참 동안 플랫폼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오자, 아버지가 있던 자리가 텅 빈 채 있는 것을 한동안 지켜보고 서 있었다. 같이 있을 때는 몰랐지만 막상 떠난 아버지의 빈자리는 너무나 넓게 보였다. 고흐는 “아이처럼 서럽게 울었다.”고 편지를 남겼다. 다시 용기를 낸 고흐는 그 이듬해 또 6개월간의 설교자 수습 기간을 다른 지역에서 가졌지만 역시 정식 임명을 받을 수 없었다.
고흐는 그때의 기록을 이렇게 남겼다. “아버지는 나를 항상 꿈만 꾸고 실행할 능력이 없는 사람으로 여긴다. 나는 불행과 실패의 사슬에 매여 있다.” 그러면서 고흐는 자신의 처지를 당시에 유명했던 장 레옹 제롬의 작품 <포로>에 나오는 포로에 비유하곤 했다. 그 포로는 그림 속에서 배의 아래에 묶여 조롱을 받으며 누워 있다. 고흐는 자신의 아버지가 “눈과 귀를 닫았고 나에 대해 모질게 마음을 먹었다.”고 입버릇처럼 말해 왔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아버지는 말도 안 되는 주변의 소문만 듣고 아들에게 윽박지르며 자신의 꿈을 비웃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화해나 용서를 통한 길이 아니었다. 고흐는 <포로>를 보면서 말했다. “내 생각에, 족쇄를 차고 누운 남자가 결국 승리해서 자신을 조롱하는 자보다 더 나은 자세에 있는 것 같다.” 고흐는 이제 가출을 결심하면서 오랫동안 구속돼 있던 아버지라는 감옥에서 진정한 자유를 찾고자 했다.

2년여 고생 끝에 서른 살이 되어 다시 집에 돌아온 고흐는 첫날부터 아버지와 다투었다. 고흐는 2년 전 아버지와 다툰 원인에 대해 사과를 요구한 것이다. 예순 살 아버지는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고흐는 자신이 입은 상처를 크게 소리쳤다. 아버지가 어떤 말이나 행동도 철회하지 않으려고 하자, 고흐는 살아오면서 수천 번도 넘게 되뇌었을 비난을 쏟아부었다.
"아버지는 공정하지 못하고 독단적이며 고집불통일 뿐만 아니라 설득도 하지 못하면서 알려고도 하지 않아." 아버지의 독선이 계속해서 부자 관계를 갈라놓는다고 울부짖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대답은 “내가 네게 사과할 것 같으냐?”라는 경멸적인 반응이었다. 아들은 분노하며 방을 뛰쳐나갔다. 그때의 심정을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편지에 남겼다. “아버지는 근본적으로 바뀐 게 하나도 없어.” 아들은 어릴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아버지로부터 배울 점이 전혀 없었다. 이런 아버지와의 다툼은 아버지가 죽기까지 거의 매일 계속되었다고 마을 사람들은 전한다.
<성경이 있는 정물>을 그린 시점은 그의 아버지가 죽은 지 7개월째 되던 때였다. 그림 속에 묘사된 성경은 아버지의 소유물로서 상당히 낡아 있다. 그림 오른쪽에 있는 꺼진 초는 바니타스 정물화에서 자주 사용되는 소재로, 인간의 유한성을 상징한다. 이를 통해 이 작품은 아버지라는 존재의 한계와 죽음의 불가피성을 담담히 담아내고 있다. 그런데 고흐는 이 그림의 한 구석에 책을 하나 그려 넣었다. 그리고 애써 제목을 써넣었다. "La Joie de vivre"(삶의 기쁨). 프랑스 작가 에밀 졸라의 소설로, 1883년부터 잡지에 연재되다가 1884년에 출판된 책이다. 출간된 지 1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고흐가 이 책을 열심히 읽은 듯 상당히 낡았다. 그렇다면 고흐는 아버지를 상징하는 이 그림에 굳이 에밀 졸라의 소설을 집어넣은 이유가 무엇일까?

에밀 졸라는 고흐의 아버지가 고흐에게 읽지 말라고 강조한 자유사상에 빠진 작가 중 하나였다. 에일 졸라의 작품을 이 그림에 넣었다는 것은 아버지와의 동일시를 거부하고 자기만의 길을 가겠다는 고흐의 굳은 의지로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소설에서 주인공 폴린은 열 살 소년으로 고아가 되어 친척들과 함께 살면서도 “진정 살기를 원한다면 담대하게 앞으로 나가야 한다.”는 말을 실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어려운 삶을 살아가지만 진실된 삶을 담대하게 살아간다. 고흐는 이 소설의 주제가 자신에게 큰 힘이 되어 이를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반면에 에밀 졸라의 소설은 이것과의 비교를 위해 영어로 번역하자면 "The Joy of Life"가 된다. 생명의 특징을 고흐는 기쁨이라고 보면서 죽은 것 같은 생명과 대립시키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 그림은 그가 아버지와의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내면에서 계속해서 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 그림에는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오는 실망과 불만이 묻어난다. 고흐는 이 작품으로 아버지와의 갈등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며, 그가 더 이상 아버지를 닮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흐를 상징하는 <삶의 기쁨>은 구석에 작게 그려져 있다. 고흐는 소설을 작게 그림으로써 자신의 삶에 대한 불안과 욕구를 표현하고 있다.
아버지가 죽기 전에 아들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프로이트는 성인의 인격 구조와 신경증 유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적절한 해결 여부와 이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하였다. 이는 인간의 성장과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이슈로, 이것을 해결함으로써 개인이 보다 더 건강하고 안정적인 인격 구조를 형성할 수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책임감 있는 규범과 요구를 받아들이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과정은 자아 발달에 필수적인 요소다. 이는 아버지를 본으로 삼고 본받는 동일시 과정이 자아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의미가 된다. 결론적으로 아버지의 역할은 자녀의 성장과 발달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이를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고흐의 여러 정신적 불안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잘 해결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고흐가 진정한 삶의 기쁨이자 아버지에게 원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제롬의 <포로>를 보며 고흐가 늘 말했던 ‘진정한 자유’였다. 자녀 양육에서 아버지의 역할이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의 자녀들을 있는 그대로 따뜻하게 받아들이며 자유로움을 최대한 보장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다시 불행한 고흐를 탄생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