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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 수 없다면 태워버리겠어"…명품업체들 '불장난'에 제동 건 E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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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연합(EU)이 의류·잡화의 고의적 폐기를 금지하는 방안을 추진한다. 그간 유럽 섬유 산업계는 온실가스 배출 주범으로 지탄 받아왔다. 유럽 탄소 배출량의 20% 가량이 섬유산업 폐기물에서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 당국은 이번 법안을 통해 친환경 목표를 달성한다는 방침이다.

EU 집행위는 지난 12일(현지시간) 회원국 각료 이사회에 "역내 섬유 산업계가 미판매되거나 환불된 의류·액세서리 등을 파기해서는 안된다"는 내용 등이 담긴 법안 '에코디자인'의 초안을 제출했다. 이는 집행위가 작년 3월 발표했던 '지속가능하고 순환적인 섬유 전략'의 후속 조치다. 당시 집행위는 "2030년까지 EU 내에서 판매되는 모든 섬유제품을 '내구성 있고 수선과 재활용이 가능한 소재'로 만들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집행위는 코로나19 이후 온라인 판매 채널이 급성장하면서 '쉽게 주문하고, 쉽게 반품하는' 문화가 퍼졌다는 점을 꼬집었다. 재고 처리에 난항을 겪는 섬유 산업계가 의류, 신발 등을 불태워버리면서 환경오염의 또 다른 주범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들은 당초 명품·패션 브랜드 대기업들에 폐기된 재고 수량에 대해 보고하도록 의무를 부과하는 정도의 규제안을 내놨다. 하지만 최근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구체적으로 폐기 행위 자체를 금지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유럽에서는 매년 약 600만t의 섬유가 버려지고, 그중 재활용되는 비율은 4분의1에 불과한 것으로 추산된다. 소비자가 옷을 구매한 매장 등에 반품할 경우 환불 품목은 유통소매업체가 처리하기 복잡하기 때문에 폐기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부 명품·디자이너 브랜드 기업의 경우 재고가 암시장에 유통되면 정품 가격 관리가 어려워지고 브랜드 가치를 깎아내릴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미판매 물량을 일부러 불태우기도 한다. 영국 명품 버버리는 2018년까지 매년 3000만파운드(약 500억원) 상당의 미판매 물품을 소각했다고 밝혔으나, 환경단체 반발 등으로 이 같은 소각 관행을 중단한 상태다.


EU 집행위는 특히 구체적으로 패스트패션 기업들을 겨냥하기도 했다. 패스트패션이란 소비자의 기호를 즉시 파악해 유행에 따라 빨리 바꿔 내놓는 의류를 의미한다. 미국 갭(GAP), 일본 유니클로, 스페인 자라, 스웨덴 H&M 등이 대표적인 패스트패션 기업들이다. 이들 기업이 유행을 좇아 대량 생산한 의류, 잡화가 결국 대량 폐기물 배출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지적이 계속되자 집행위는 법안 초안에 "패스트패션 시대는 끝났다"는 문구를 포함시키기도 했다.

초안에 따르면 의류업계의 중소기업은 폐기 금지 대상에서 당분간 제외된다. 직원 수가 249명 이하이고 연간 매출액이 5000만유로 미만인 경우 유예 기간을 부여하기로 했다. 또 온라인 판매점에서 법안을 준수하는 제품들 위주로 입점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제품의 제조 과정 등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제품 여권' 조항도 마련됐다. EU 이사회는 이르면 오는 22일 해당 법안에 대해 투표를 진행한다. 이후 유럽 의회의 표결 절차를 거치면 최종 발효된다.

하지만 업계와 일부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반발이 계속되고 있다. 한 EU 외교관은 "회사들의 재활용 등 가공 비용이 늘어나면 결국 소비자 가격 상승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루이비통, 샤넬 등 명품 브랜드 강국)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최근 지나친 친환경 규제가 유럽의 경제 전반을 위축시킬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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