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찬 디올 ⑤
크리스찬 디올이 세상을 떠난 뒤 21세의 젊은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이 수석 자리를 물려받아 트라페즈 라인을 발표했다. 그는 “이브 생 로랑이 파리를 구했다”는 칭송을 받았고 1960년 봄여름 컬렉션은 디올 하우스의 컬렉션 중 가장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1960년 가을겨울 컬렉션에서 거리의 청소년들에게서 영감을 받은 대담한 비트룩은 우아한 디올 라인을 선호하는 고객들에게 외면당했다. 결국 디올의 경영진은 로랑을 해고했다.
이후 로랑은 평생의 파트너인 피에르 베르제와 함께 자신의 브랜드인 이브 생 로랑을 론칭했다. 로랑에 이어 마크 보앙이 28년간 수석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남성 향수, 아동복, 남성복 라인을 발표해 최장수 디올의 수석 자리를 지켰다. 이어 이탈리아 출신의 지안프랑코 페레는 디올이 LVMH그룹에 인수된 후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이 직접 선정한 수석 디자이너다.
페레에 이어 디올의 수석 디자이너 자리는 영국 출신의 ‘패션계의 악동’, ‘로맨틱의 영웅’, ‘패션계의 천재’라는 수식어로 유명한 존 갈리아노가 차지했다. 1984년 갈리아노는 런던의 패션스쿨 세인트 마틴을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는 졸업 패션쇼에서 8벌의 유니섹스 룩으로 구성된 작품들을 프랑스 혁명에서 영감을 얻은 ‘믿을 수 없는(Les Incroyables)’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이 8벌의 작품들은 런던 최고의 부티크 ‘브라운(Brown)’에 모두 팔렸다. 갈리아노가 패션업계에서 큰 주목을 받게 된 계기였다.
그는 곧바로 자신의 브랜드를 론칭했다. 다소 상업적인 면과는 거리가 있는 아방가르드한 작품들을 1984년부터 1989년까지 런던 컬렉션에 발표했다. 갈리아노는 화려한 패션쇼 비용을 감당하지 못했고 몇 년 후 갈리아노의 브랜드는 재정적인 문제로 파산 위기에 놓이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7년 ‘올해의 영국 디자이너’에 선정되는 아이로니컬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갈리아노는 1994년 ‘올해의 영국 디자이너’를 둘째로 수상했다. 하지만 당시 그는 브랜드의 재정이 어려워 ‘1992~1993 가을겨울 컬렉션’을 발표하지도 못한 상태였다. 패션계에서 호평과 촉망받는 디자이너임에도 불구하고 재정적으로 파산의 위기까지 내려가게 되면서 그는 한계에 부딪쳤다. 그때 그를 위기에서 구해 준 사람은 미국판 보그 편집장인 안나 윈투어였다.
윈투어는 갈리아노의 ‘1993 봄여름 패션쇼’를 본 후 그를 응원하게 됐고 윈투어를 통해 후원자들이 생기면서 갈리아노는 재도약하는 발판을 잡게 됐다. 1995년 LVMH의 아르노 회장에게 스카우트돼 지방시의 수석 디자이너로 일했다. 1년 뒤인 1996년 10월 그는 같은 그룹 소유의 크리스찬 디올 하우스의 수석 디자이너에 발탁됐다. 그는 현대 파리 오트 쿠튀르 하우스의 수장이 된 최초의 영국 디자이너였다. 그는 과감하고 정열적인 디자인과 실험적인 아방가르드 스타일로 디올 왕국을 부활시키며 세계의 패션 트렌드를 주도한 패션계의 혁명가로 평가 받았다.
갈리아노는 디올이 추구해 온 여성스럽고 우아한 하이패션의 이미지를 보다 젊은 여성의 이미지로 만드는 데 심혈을 기울였고 성공했다. 다양한 문화적 요소와 스트리트 패션에서 얻은 영감을 로맨틱하고 젊고 보다 캐주얼한 디자인으로 디올이 가진 전통성을 현대적으로 바꿨다. 이는 디올의 매출이 4배로 증가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이후 그의 언행은 많은 논란을 낳았다. 갈리아노는 2011년 2월 파리의 한 카페에서 인종 차별적 발언으로 고소 당했고 결국 유죄 판결을 받아 피해자들에게 벌금을 지불했다. 또 “히틀러를 사랑한다”고 말한 동영상으로 인해 디올 하우스에서 해고됐다. 10년 넘게 디올을 현대화하고 혁신화한 패션계의 천재, 패션계의 악동은 이렇게 추락했다.
디올과 갈리아노는 영국 다이애나 왕세자비와 인연도 깊다. 1996년 12월 갈리아노의 첫 패션쇼 론칭 파티에서 다이애나 왕세자비는 갈리아노의 드레스를 입었다. 앞서 베르나테트 시라크(자크 시라크 전 프랑스 대통령 부인)는 1995년 9월 파리 그랑팔레에서 개최된 폴 세잔 회고전 개막식에서 다이애나 왕세자비에게 디올 가방을 선물했다. 다이애나 왕세자비는 이 가방을 마음에 들어 했고 많은 공식 석상에 디올 가방을 들었다. 디올하우스 창립 50주년을 맞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대규모 전시회를 열었을 때도 다이애나 왕세자비는 미니 레이디 디올백을 들었다.
이 가방은 왕세자비와 잘 어울린다는 호평과 함께 1996년 공식적으로 ‘레이디 디올’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애칭인 레이디 디(Lady Di)에서 유래한 이름이 새로운 가방의 역사를 쓰게 됐다. 레이디 디올 백의 퀼팅 패턴은 디올 하우스의 창립자가 자신의 패션쇼에서 게스트를 위해 마련한 나폴레옹 3세의 의자 스타일에서 착안한 것이다. 이 카나주 퀼팅 패턴은 디올의 의류와 가죽 액세서리에 다양하게 사용돼 디올을 대표하는 패턴이 됐다.
류서영 여주대 패션산업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