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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에서 '여대'의 의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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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민 캠퍼스 잡앤조이 기자/이슬기 대학생 기자) 2009년 UNDP가 발표한 인간개발지수에 의하면 한국은 여성개발지수(HDI)가 182개국 중 22등인 한편, 여성권한척도(GEM)은 109개국 중 61등이다. 여성에게 일자리는 주어지지만 여전히 고위직은 남성들에게만 열려있다는 것이다.

교육부와 한국교육개발원의 ‘교육통계연보’에 따르면 2017년 여성의 대학 진학률은 72.7%, 남성의 대학 진학률은 65.3%로 성별에 의한 대학 진학률 차이는 7.4%이다. 고등학교 진학률이 98%에 이르는 지금, 대학 또한 남녀노소 진학을 하고 있다. 이제는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중학교 진학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던 과거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과거엔 자식들을 교육하기 위해 10~20대의 어린 엄마들이 공장에 가서 돈을 벌어왔다. 벌집 구조의 숙소에서 잠을 자며 반나절 이상 일을 하고 저임금을 받았다. 그 돈마저도 자식에게 돌아갔다. 기자의 할머니 이야기다. 3녀 3남 6남매의 셋째였던 할머니는 중학교 진급 시험에서 마을 1등을 하고도 중학교 진학을 할 수 없었다. 아들의 기가 죽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공부하는 남자 식구들을 위해 끼니를 나르며 농사를 지었다. 그렇게 3명의 아들은 모두 서울대에 갔고, 할머니는 과일장사로 생계를 꾸리며 살았다. 남성으로 태어났다면 할머니도 서울대에 나와 세 명의 아들들처럼 떵떵거리며 살 수 있었을까. 여성들은 그렇게 역량 개발에 제한을 받으며 살아왔다. 여성은 집안의 소유물이자 아들을 키우기 위한 노동력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런 한국에 여대가 세워졌다. 이때 대학에 ‘여(女)’가 붙은 이유를 단어의 유표성으로 설명하면 쉽다. 유표성이란 상반된 두 개념 중 나중에 개념화된 것으로, 유별나고 특이해서 주목을 끄는 개념이다. 기존의 모든 대학들이 남성들의 전유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남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도 이를 유별나거나 특이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남성이 교육을 받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거와 달리 여성이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특별한 일로 인식되지 않는 지금, 여대라는 이름 자체의 유표성은 유효한가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2019년 2월 기준 대학별 여성학 강의 개수에 따르면 이화여대 13개, 동덕여대 9개, 숙명여대 9개, 서울여대 3개로 서울여대의 여성학 강의는 타 여대와 비교했을 때 매우 낮은 편이다. 이에 서울여대 교내 페미니즘 소모임 ‘FIREWORK’는 여성학 강의 추가 개설 요구안을 작성하고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이처럼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장이 여대다.

2주간의 서명운동을 진행한 언론영상학부 재학생 고은(21)씨는 “누군가는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 주고 싶었다”며 계기를 밝혔다. 이어 “교내에서 ‘페미’, ‘메갈’로 찍힐까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공간, 검열 없이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공간, 이런 공간 안에서 배우는 여성학이란 여성에게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며 한국의 여대에서 여성학이 갖는 의의를 제시했다.

남녀 공학 대학 중 한 곳인 연세대는 올 8월 13일, 젠더 인권 교육의 교양필수화를 반대하는 집회를 열었다. 이들은 무분별한 인권교육이 바른 성문화를 무너뜨리고, 동성애 옹호를 조장한다며 역차별을 당하는 이들에게 왜곡된 인권 의식을 심어주지 않을까 염려된다고 주장했다.

온전히 남성의 것이었던 젠더 권력을 여성들이 인지하고 쟁취하려는 시도를 하고 목소리를 내는 것 자체, 그리고 이를 인식하도록 교육하는 것에 위기를 느꼈을 것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바른 성문화란 무엇일까. 소위 일류 대학을 졸업해 훗날 자식에게 구구단을 가르치는 엄마, 남편이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 저녁을 준비하는 그런 성(性) 문화를 말하는 것일까.

역차별이라는 단어는 간사하다. 또한 역차별은 차별이 선행되었음을 스스로 인지하는 것이다. 기존의 차별이 없었다면 역차별 또한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선재한 차별이 아닌 소소한 차별을 역차별이라고 주장하며 억울함을 호소한다. 또한 그들이 주장하는 차별은 기존에 여성들이 받아온 차별에 ‘역(逆)’하는 개념일 수 없음은 분명하다.

‘마지막 유토피아, 여대’. 여대라서 진학이 망설여진다는 푸념에 가장 많이 달리는 댓글이다. 공학 대학이 여총학생회를 없애고 여총학생회가 학생회실을 지키기 위해 칩거를 하는 동안 여대의 대학생들은 학교를 꾸려간다. 페미니스트라는 이유로 신상이 공개되거나 사이버불링을 당하는 공학과 달리 여대는 여성학을 하나라도 더 늘리기 위한 서명운동을 진행 중이다.

서울여대 페미니즘 소모임 ‘FIREWORK’의 언론영상학부 재학생 허수경(20) 씨는 “여대는 맨스플레인 없이 페미니즘을 안전하게 배울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며, 여성들이 사고하는 데에는 여성만의 공간이 필요하고 그 역할을 해주는 곳이 여대”라며 여대는 계속 존재해야 한다는 의견에 힘을 실었다. 여대에서는 여성이 분리된 하나의 집단이 아닌 그저 대학의 구성원인 것이다. 당연히 모든 학생회의 구성원은 여성이며, 여대의 구성원들은 서로 도우며 여성연대를 만들어간다.

사회구성원인 남성과 협업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남성은 여성과 일을 하는 법을 배우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기업 내 젠더평등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남성의 일에 여성을 끼워주는 것이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이에 기반한다면 저 주장은 타당성이 없으며 남성 중심적 사고이다. 여성이 주도하고 끌어가며 만들어가는 사회, 마지막 유토피아가 여대임은 분명하다. 여대에서 여성연대를 배운 여성들은 사회에 나가 목소리를 낼 것이다.

서울여대 디지털미디어학과 재학생 황윤경(21) 씨는 “여대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약자가 되지 않아 ‘여성으로서 나’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나’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곳이기에 한국 사회의 가부장제가 붕괴되고 여성혐오가 사라진 세상이 오지 않는다면 여대는 존재해야 한다”며 한국 사회에서 여대가 계속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기에 여대는 존재해야 하며 여대가 가지는 유표성이 약화된 지금 여대의 ‘여(女)’를 제거하는 것은 유의미하나 대학의 이름이 겹치는 등 현실적인 문제가 있다. 한국사회에서 여대는 반드시 존재해야 하며 여대는 여성들이 누릴 수 있는 마지막 유토피아다. (끝) / min503@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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